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전에 읽었던 책 리스트에 포함되어서 더욱 유명해진 책.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라이시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하다가, "내 삶에서 일 외의 나머지 부분이 건포도처럼 말라비틀어져 버렸다"며 가족과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한다는 등의 이유로 장관직을 사임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옥스퍼드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고, 예일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직을 떠난 지금은 U. C. Berkeley의 공공정책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란다.
 저자는 대략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균형이 잘 잡혀있었던 것으로 본다(앨 고어나 폴 크루그먼도 비슷한 얘기를 하던데, 비슷한 연배로서 미국 사회의 변화를 겪어 왔기 때문에 비슷한 판단을 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 점에 대해 좀더 보편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시기에 미국의 경제는 대량생산에 기반하고 있었고, 대량생산의 수익이 대기업으로부터 납품업체, 유통업체, 그리고 근로자들에게 흘러들어 가면서 중산층의 구매력이 강화되어 지속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고, 한편 민주주의는 대규모 생산의 경제적 힘을 상쇄해 그 혜택을 널리 분산시켰다(물론 여전히 정치적 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등 여러 한계는 있었지만, 그래도). 정부가 만들어낸 각종 규제는, 규제에 대한 열띤 비판론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산업을 안정시키고, 일자리와 임금을 보장하고,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보호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규제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업의 수를 비교적 제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가장 낮은 가격에 가장 좋은 품질의 제품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전 또는 후의 시대보다 더 안정적이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신기술의 발전은 전지구적인 공급 체계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제품 생산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춤에 따라, 수없이 많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한경쟁이 촉진되면서, 소비자들에게는 점점 더 싼 가격에 최고의 제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지만, 기업간의 치열한 경쟁은 근로자의 임금을 줄이고, 노조를 해체하며, 그 결과 빈부의 격차를 확대하고, 또 환경을 파괴시키고,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 침해를 묵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을 들어 '악덕 기업의 부도덕한 행실'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불매 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슈퍼자본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업이 그와 같은 비판에 직면하여 얼마간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착한 척' 하는 일들을 할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착한 척'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면피용이거나(예를 들어, 월마트에서는 기업 이미지 개선을 위하여 쇼핑백 재활용 프로그램이라던지, 카트리나 대참사에 꽤 많은 돈을 기부한다던지, 시간제 근로자들의 아이들에게도 의료보험 혜택을 부여한다던지 하는 좋은 일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마트의 성장이 지역의 소규모 상인들의 상권을 잠식해 버린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전혀 내지 않는다) 기업이 꽤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런 좋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가격과 품질에 만족한 소비자가 물건을 사고, 이윤 창출에 흡족해 하는 투자자가 주식을 산다면 기업으로서는 그들이 직면하는 여러가지 비판에 대해 'so what?'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는 거다.

 

 결국은 우리 안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민'이 우리 안의 (낮은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사고 싶어하는) '소비자와 투자자'를 억제함으로써 슈퍼자본주의의 폐해를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인데, 저자는 그 유일한 방법은 법과 규제를 통해서 우리의 구매와 투자가 개인적인 선택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선택이기도 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시민'으로서는 지역의 자영업자들을 보호하여야 하고, 월마트 때문에 동네의 슈퍼마켓들이 경쟁력을 잃고 모두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결국 싸고 품질도 괜찮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월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 버리게 된다. 누구나 혼자만 착한 바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월마트의 지나친 확장을 규제하는 법률이 통과되어, 지역의 소매업자로부터 조금 더 비싸진 가격에 물건을 구매하게 되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시민'으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의 나의 선택권이 조금은 제한되는 것을 용인하고 물건을 구매할 것이다. 즉,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괴리를 일으켰던 소비자로서의 나의 선택과 시민으로서의 나의 선택이, 제도와 법의 존재로 인해 좀 더 일치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소비자로서의 개인적 선택과 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선택을 일치시키기 위하여는 민주주의가 잘 작동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기업은 자신에게 불리한 규제를 철폐하기 위해, 또는 "경쟁 기업에 불리한 규제를 만들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로비를 벌이지만, 공공선을 추구하는 비영리단체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의회에 대한 접근성이 전보다 더 낮아지게 되었다. 정치권과 일반 대중 사이의 가교가 점점 약화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의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이, 사실은 '공공의 가치'를 명분으로 한 기업 간의 싸움이라는 점을 잘 알지 못한다.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공간과 정책 결정자들은 전혀 직접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즉, 슈퍼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나서야 하는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한 슈퍼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민주주의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시급한 것은 '기업을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 변호사, 홍보 전문가들이 모든 정치적 과정을 좌우하고, 기업의 자금이 거의 매일같이 시스템 속으로 들어와 시민의 목소리가 들어갈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것'을 막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거 후원금의 엄격한 제한(다만 이것은 '정치적 자유의 침해'라는 헌법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연방대법원은 후원금의 제한 등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 기업의 로비 및 홍보 활동 제한이 그 방법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한편 '법학도'의 주장으로는 특이하다고, 심지어는 충격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기업이 마치 '독자적 법인격'을 가진 존재인 마냥 여겨지도록 하는 제도들, 예컨대 기업에 형사적 책임을 부과하거나, 법인세를 매기거나, 소송에서 자연인처럼 법적 권리를 주어 법정에서 다툴 수 있게 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설정한 문제의 구도에는 일응 수긍이 가면서도(특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문제의 해결을 방해한다는 부분은 새로우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통해 의회를 장악해 버린 이 상황에서, 선거 자금을 개혁하는 법은 어떻게 만들고, 로비 활동을 제약하는 법은 어떻게 만드나? 하는 의문이 수그러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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