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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번역자 김남주 이 사람 무지 웃기는 사람이다.
다음은 김남주가 번역한 민음사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작품 해설 끝부분이다.
"(전략) 페스트균처럼 뻔한 결말로 독자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멜로드라마에 머무는 대신, 갑자기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지는 각성의 '엔딩'을 선사하고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강을 다시 읽는다."
작품 해설 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페스트를 들먹며 뻔한 결말이라는 둥, 의식을 마비시킨다는 둥 무언가를 비판하고 있다.
저 지적이 분명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두고 한 비판이란 것쯤은 누구나 알 터.
그래서 저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작품 해설 중에 밑도 끝도 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는 상태에서 페스트를 들먹이는 게 웃기다.
앞전에 어떤 도입이라도 있다면 모르겠다. 그냥 불쑥 등장하는 비판이다. 말 그대로 뜸금없는 비판. 앞.뒤 아무런 맥락이 없다. 저 무슨 억하심정이란 말인가?
둘째, 소설에서 독자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부류가 있다면 오히려 이런 연애소설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난 연애소설 무용론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지금 라마르틴의 <그라지엘라> 읽고 있다. 이거 원단 연애소설이다)
그래, 김남주 말에 억지로라도 동의를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김남주가 번역해서 낸 이런 연애소설들은 도대체 어떤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거지? 어떤 각성을 가져온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지.
그리고 소설 페스트가 단지 의학 관련 드라마적인 소설이던가?
전쟁 상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그 고립된 상태를 페스트균 전염 상태로 빌어온 것 아니었나? 그것도 모르고 읽었나 이 사람이? 그리고 사고의 치밀함 같은 건 마이동풍이었나? 그 유명한 제사도 눈에 안 들어왔단 말인가?
"일종의 감금 상태를 다른 종류의 그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마치 무엇이든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합리적이다. -다니엘 디포-"
이 사람 페스트를 읽기나 읽은 사람인가 의문이 든다. 사람이 왜 이리 편견이 심한고?
저게 작은 부분이란 건 나도 안다. 그러나 질적으로 심대한 무게를 갖는 문장이 아닌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맛 있게 밥을 먹다가 마지막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는데 그게 쥐똥이었던 거다. 이 기분 그대로다. 전체 양으로 보면 그저 한 숟가락. 그러나 이게 눈 감고 넘어갈 사소한 문제일까?
한 줄 요약. "뭔가를 찬양하고 싶거들랑 그거 하나만 하시오. 애먼 사람 잡지 말고."
한 줄 추가. "아니면 정당한 방식으로 제대로 평을 하든가. 뭐요 저게? 속 좁은 애들 편견 덩어리지."
학창시절에 <브람스......>를 읽고서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려고 읽었는데 사실 나이 들어 읽기엔 간질간질했다 유치해서. 그래도 그건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작품해설이랍시고 떠드는 저 황당무계한 말이 끝내 기분을 잡쳐놓았다.
사강이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싫지도 않았는데 이젠 김남주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찬양하는 꼴을 보자니 솔직히 싫어지려고 한다.
이 사람이 불법 번역물로 돈 좀 벌더니 보이는 게 없나 보네.
도대체 이 사람이 번역한 책 중에 저작권료 주고 적법하게 번역해 낸 책이 몇 권이나 되나?
그렇게 살았으면 사람이 입이라도 진득해야지.
그나마 이건 라이센스를 얻은 책이군.
그리고 김남주뿐 아니라 이젠 제발 불법 번역물좀 그만 찍어내자.
언제까지 저작권 무시하고 해적판만 이렇게 찍어낼 건가? G20 이네 뭐네 떠들어대면서 맨 후진국 행태만 대대손손 물려줄 건가?
내가 마이 리뷰 이런 거 한 번 써본 적이 없는데 기분 엿 같아서 썼다. 옛날엔 범우사 판으로 읽었던거 같은데 괜히 민음사 거로 사서 읽고 기분만 조졌네ㅡ,ㅡ
*한 달 후(9월 26일)에 추가*
『나는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현대소설을 단 한 편밖에 알지 못한다. 카뮈의《페스트》다. 그러나 그건《페스트》가 이별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심지어 이별이 주테마가 되길 바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별을 그가 우의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 그 전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카뮈는《작가수첩》에 1940년대 문학이 에우리디케 신화를 활용하고, 남용하고 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설명을 찾아낸다. "숱하게 많은 연인들이 이별했기 때문이다."』 <로제 그르니에, 책의 맛,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