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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고전번역 비평-최고의 번역본을 찾아서 59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 교수신문(2007. 2. 5)  / 원문의 미묘한 뉘앙스 전달 못해
고전번역 비평-최고의 번역본을 찾아서 59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인류의 영원한 스승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1873-77)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굴곡의 시기에 씌어졌다. 이 시기 그는 어린 자녀들의 죽음이라는 가정적 불행을 통해 인간존재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되며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된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낙천주의는 점차 ‘톨스토이주의’라는 당위성의 종교적 담론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소설은 이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독특한 사상적 가교 역할을 한다.


'안나 카레니나' 한국어 완역본은 13종이 존재한다. 故 동완 역(정음사, 1969)을 필두로 박형규 역(동서문화사, 1977), 故 이철 역(범우사, 1987), 오기완 역(금성출판사, 1990), 신길호 역(혜원출판사, 1993)의 전공자 번역과 한용우 역(동창출판사, 1973), 최원준 역(홍신문화사, 1995) 등의 비전공자 번역이 그것이다. 이중 동완, 박형규, 이철 등은 국내 러시아문학 연구 1세대로서 이 작품 외에도 많은 러시아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비전공자들의 번역은 중역 내지는 기존 전공자 번역을 토대로 작업한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여기서 전공자 번역을 주로 살펴보았고 비전공자의 경우는 최원준 번역만을 참고 하였다.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정신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고전문학작품 번역의 평가기준은 무엇보다도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 텍스트 이해를 위한 역주 등으로 생각된다. 필자가 검토한 '안나 카레니나'의 우리말 번역은 대체로 스토리 이해의 차원에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 괜찮은 번역들이었다. 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번역 자체의 숙명으로 인해 이 번역들 역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안나 카레니나'의 문체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특히,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많은 단어와 표현, 구문 구조 등은 소설의 번역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세심한 우리말 표현이 요구된다. 하지만 필자가 검토한 번역은 예외 없이 낯설고 어색한 우리말 번역어들을 담고 있다. 찬모(饌母), 앙가발이, 미태(媚態), 성청(省廳), 울짱, 중인환시(衆人環視), 우듬지, 은의(恩誼/恩義), 연탄(連彈/聯彈), 관도(官途), 복계(復啓), 끽다실(喫茶室), 고빗사위, 달개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철, 동완, 신길호의 번역에서 보이는 ‘피아노의 연탄을 해요’, ‘피아노를 우리 연탄으로 연주해요’라든가, 박형규의 번역에서 'tabula rasa'(백지)라는 라틴어를 ‘빨래판’으로 옮긴 경우 등은 텍스트 읽기를 난해하게 할 뿐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오독이나 오해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이들 번역의 또 다른 중대한 문제점은 동완을 제외하고 나머지 역자들이 번역 저본을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동완의 번역 저본은 1959년 모스크바 국립문예출판사 발행 '톨스토이 작품집' 12권 중 제8, 9권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의미구조 내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제사(題詞)의 경우, 신길호, 최원준, 박형규(번역본에 따라 제시한 경우도 있음)는 제시하고 있지 않은 반면 동완, 이철, 오기완은 제시하고 있다. 특히 동완의 경우는 성경의 출처까지 밝히고 있다(오기완은 작품해설에서 출처를 제시하고 있음). 또한 주인공 레빈이 삶에 대해 진지한 숙고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된, 형 니콜라이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죽음’이라는 장(章)의 제목이 붙어있는 제5부 20장의 경우도 동완, 오기완만이 제목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오역의 예도 적지 않게 보인다. 소설 첫 부분에서 “찬모와 마부까지도 급료를 계산해 달라고 졸라댔다”라는 표현을 오기완과 최원준의 경우는 “허드렛일을 하는 식모와 마부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라고 오역하고 있으며,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가 페테르부르크를 모스크바와 비교하는 대목인 제7부 20장에서 “모스크바엔 무대시설이 있는 카페와 삯마차가 있었지만, 역시 물이 괴어 있는 늪이다”라는 문장을 동완은 “(...)늪이 있다”라고 오역하였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동완, 박형규를 제외한 나머지 역자들이 등장인물의 호칭을 종종 원문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안나의 남편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라고 이름과 부칭을 사용하여 부르는 경우와 그냥 ‘카레닌’이라고 성(姓)만을 부르는 경우이다.

전자는 예절바르거나 점잖음의 뉘앙스를 함축하는 호칭인데 반해 후자는 보다 공식적이거나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서, 특히 이 작품에서는 종종 작가 자신의 말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두 호칭 사이의 뉘앙스 차이는 서술자와 대상간의 심리적 거리의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문맥적 의미와 느낌을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검토한 번역들은 전반적으로 스토리 전달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 원문의 미묘한 뉘앙스라든가 당시의 문화적 의미층위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제6부 24장에서 안나의 올케인 돌리가 브론스키의 시골 영지에 내려와 있는 안나를 만나고 떠나는 장면의 번역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다음날 아침 주인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낡고 긴 코트를 입고 어딘지 역마차 마부의 것 같은 모자를 쓴, 레빈의 마부는 음울하지만 의연한 표정으로 모래가 뿌려져 있고, 지붕이 있는, 마차 대는 현관 앞쪽으로 얼룩덜룩한 털빛의 말들이 끄는, 누덕누덕 기운 흙받기를 댄 포장마차를 몰고 들어왔다.”(지면상 원문 생략) 여기서 동완, 박형규를 제외하고 나머지 번역자들은 모두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돌리’로 오역하고 있으며, 동완과 오기완은 ‘흙받기’를 ‘흙받이’로 오기하고 있다.

또한 ‘역마차 마부의 것 같은 모자’를 동완, 박형규는 ‘절반쯤 구멍이 뚫린 모자’로, 신길호는 ‘역마차의 마부 같은 냄새가 나는 모자’ 등으로 오역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러시아 대귀족 저택의 현관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이철을 제외한 나머지 역자들은 ‘모래가 뿌려져 있는 지붕을 이은’과 같이 쉼표를 생략함으로써 모래가 바닥이 아닌 지붕에 뿌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더욱이 동완과 박형규는 ‘모래’를 ‘자디잔 자갈’, ‘자갈’ 등으로 오역하고 있다. 아울러 이 번역문만으로는 지주의 유개마차를 끄는 마부와 싸구려 역마차나 짐마차를 끄는 마부 사이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나 전자의 외양을 후자에 비유하여 묘사함으로써 톨스토이가 간접적으로 레빈의 청빈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보다 심도 있는 내용의 역주 역시 필요하다. 소설의 첫 번째 문장에 비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오블론스키 집안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라는 두 번째 문장은 가정사와 집의 주제라는 측면에서 20세기 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된다. 예를 들어, A.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 문장이 “이 집에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로 거의 그대로 반복, 인용되고 있으며, A. 비토프의 『푸쉬킨의 집』에서는 “오도예프체프 家 사람들 가운데 레바 오도예프체프의 삶에서는 특별한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로 매우 역설적이고 암시적인 형태로 재등장한다. 이처럼 『안나 카레니나』의 주제구조 안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학사에서도 커다란 의미론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문장은 번역자의 주해 없이는 그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이제 종합적으로 번역평을 한다면, 가독성에 있어서는 이철 번역이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다. 긴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누어 풀어서 번역한다거나, 어구에 맞는 적절한 구어의 사용, 판을 거듭하면서 다듬어진 문장 등은 이 번역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톨스토이 원문에 등장하는 각종 외국어의 원어 병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점과 상대적으로 잦은 한자 역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은 이 번역의 한계이기도 하다.


박형규 번역의 경우 번역의 정확성은 대체로 만족할만한 수준이라 하겠다. 가독성 역시 간혹 고어체적 어법이 보이기는 하나 중판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레 다듬어져 무난하다. 특히, 이철 번역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한자 역어가 적으며 자연스러운 우리말 역어를 찾아 이해도를 높이려는 한 노력이 돋보인다.


동완 번역은 원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필자가 구해본 번역 중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이루어졌으며, 비록 고어체적 어법이 많이 묻어나오지만, 가독성에 있어서도 무난하다. 아마도 뒤에 나온 『안나 카레니나』 번역들은 직간접적으로 이 번역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다른 국내 번역들이 모두 무시하고 있는 톨스토이 원문 텍스트에 이탤릭체로 강조된 어휘들까지 ‘방점 표시’를 통해 모두 다 정확히 표시해주고 있다.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동완 번역이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가장 추천할 만한 번역으로 사료된다. 덧붙여 오기완, 신길호, 최원준 번역은 위 3사람의 번역을 저본으로 한 재번역으로 판단된다.


김성일/ 청주대`러시아어문학

필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유토피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는 톨스토이의 '참회록', '인생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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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TexTan > 벤토프, 폴 데이비스의 물리

 고등학교 때 읽은 과학책이 많아봤자 얼마나 되겠나만은 강하게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우주심과 정신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이렇게 두 권이다.

 

 

 우주심과 정신물리학

<우주심과 정신물리학(Stalking the Wild Pendulum : On the Mechanics of Consciousness>은 그 당시 나에게 꽤 충격이었는지 나중에 몇권을 더 사서 친구들한테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상당히 개성 있는 물리학책이다. 어떻게 보면 '몸의 물리학'이라 할 수 있고, 그 파동의 물질 특성이 의식에까지 이어지는 (영향을 주는) 과정을 독창적으로 그려낸다. 더우기 이 책에서는 '쿤달리니 증상'을 두뇌 안에 미세한 점의 위치와 연관지어 살피기도 하는데, '의식'에 대해 상당히 위로 열린 자세로 흥미로운 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기존의 어떤 책들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저자 스스로 알아낸 아이디어나 사고들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유사한 흐름의 책들에서 보이는 어떤 무임승차하고는 성격이 다르다. 즉 어떤 특이하고 기발한 것들을 모아서 자기 방식대로 꿰어 놓은 알록달록 헝겊 같은 모양은 아닌 것이다. 

 

이차크 벤토프(Itzhak Bentov)(왼쪽 사진)는 1979년에 아깝게도 비행기 사고로 죽고, 아주 짧은 글이 가까스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우주의식의 창조놀이( A Brief Tour of Higher Consciousness>의 제목으로 나왔다. 원제보다 우리나라 번역서 제목이 더 좋아 보인다. 책의 내용이 워낙 짧기 때문에, 서문과 뒤에 부록이 붙어서 널널한 편집으로 겨우 한권으로 만들어낸 거 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은 대단히 파격적인 여행-니르바나 여행을 펼치고 있다.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지 않아 속 시원한 맛은 없지만, 어떤 은유적 모멘트는 놀라울 정도다. 나머지는 읽은 사람들 머리 속에서 나름대로 펼쳐져야  하지 않을까.

 

 

폴 데이비스(Paul Davies)<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역시 물리학의 도움으로 우리가 어디까지 사고 여행을 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폴 디렉(Paul Dirac)(오른쪽 사진. 외모에서 언뜻 비트겐슈타인 분위기가 난다)이라는 천재 물리학자가 자신의 방정식을 통해 미지의 입자를 예언하고, 또 그것이 나중에 실험에 의해 발견되는 드라마틱한 부분이 재미있었다(전자의 거울 이미지로 쌍이 되는 반대 성질을 가진 반전자(反電子)의 예고). 디렉은 물리 실험 보다는 이렇게 방정식 자체의 아름다운 형식에 더 매료되고 그것을 추구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원자 속의 유령>,<슈퍼스트링>, <초힘>은 마치 시리즈처럼 순서대로 읽어도 좋을 만큼 연속성이 있다.

 

 

<원자 속의 유령><슈퍼 스트링>은 폴 데이비스와 줄리언 브라운이 함께 엮은 책으로, 각각 양자역학과 끈 이론에 대한 대담형식의 책이다. 대담에 들어가기 앞서 간략한 이론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어, 읽기에 좀 수월한 감을 준다. <원자..> 이 책에서는 데이비드 봄이 눈에 띄며, <슈퍼 스트링>에는 스티브 와인버그와 리처드 파인만 같은 유명한 물리학자와의 대담을 통해 양자역학과 끈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급소를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다. 특히 파인만은 끈이론에 대해 회의적인데, 그와의 물음과 대답 속에는 폴 디렉도 나온다.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1963)>에서 쉬운 부분만 골라서 재편집한 것이다. 폴 데이비스는 이 책에서 약 10 쪽(번역서 기준)의 서문을 썼다.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대단히 인기 있는 물리학자인데, 아사람의 책도 나중에 마틴 가드너와 함께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양장본과 보급판이 출간 되었는데, 나는 보급판으로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두께로 볼 때, 굳이 양장본으로 가질 이유는 없을 거 같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는 우리나라에 Volume 1, 2로 나왔는데, 두께가 만만치 않아서인지(각각 700에서 800쪽 사이다) Volume 1은 다시 Volume 1-1, Volume 1-2 반양장본으로 나뉘어 나왔다. 하지만 이럴 경우엔 차라리 양장본이 값도 별로 차이 안나고 소장면에서 유리할 거 같다.

추천사를 보면, 쟁쟁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황제의 새마음>, <우주 양자 마음>로저 펜로즈<초공간>, <평행 우주>미치오 가쿠 등이다. 대단히 광대한 양의 물리학책인데, 이 긴 도전에 앞서 당분간 '여섯 가지 물리'로 만족해야 겠다.

 

 

 <폴 데이비스의 타임머신(How to Build a Time Machine)>은 <시간의 패러독스 (About Time)>와 함께 '시간'을 정면으로 주제로 삼은 책이다. <시간의 패러독스>에 "오랫동안 고생을 참아준 가족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는데, 거의 500쪽이 넘는 이 책을 다 보는 것도 독자 입장에선 고생스러울 거 같다. 폴 데이비스는 <생명의 기원>도 그렇고 <우주의 청사진(The Cosmic Blueprint>에서 보듯이 대단히 원대한 기획을 책에 담는다. 두 권 다 '자기조직화'가 양념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는 데,  진행 방식도 유사하다(폴 데이비스 책들이 대개 비슷한 차례 패턴을 가진다). <우주의 청사진>은 주제와 방향은 좋아 보이는데, 책의 양도 그렇고 충분히 뭔가를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용두사미처럼).  어쨌든 <...타임머신> 이 책을 보고 '타임머신'에 관한 영화를 즐긴다면 그 재미는 배가 될까 아니면 별효과가 없을까? 얼마 전에 기대하지 않고 봤던 [타임라인(TIMELINE)]이 생각이 난다. 마이클 크라이튼 소설을 가지고 만든 영화로 프랑스에서 유적 발굴을 하다가 교수가 과거로 사라지게 되는데, 여기에 벌어지는 과학자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남녀의 사랑 등이 골고루 담겨 있다.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었는데 중세 전투 장면도 볼거리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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