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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김미향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5월
평점 :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고 나는, 펑펑 울었다.
엄마의 오롯한 내리사랑만을 받고 자란 주제에 서른이 넘어서야 애틋하고 유난한 관계를 가지게 된 나는, 책 속의 정숙씨가 꼭 나의 기숙씨 인것만 같아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이에게 메일을 보내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구구절절 써내려간 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의 끝에는, 아직 버티고 있는 나의 기숙씨가. 지금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기숙씨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과 함께 엄마박물관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처음으로 기숙씨의 이야기와 엄행다의 리뷰를 남기고자 한다.
수 차례 반복해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행다는 읽을 때 마다 말라버린 내 눈물샘을 자극한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엄마를 위해, 읽는다면 우리들의 엄마는 적어도,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지지않을까. 그럴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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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못해준 게 많아서, 미안한 게 많아서, 내가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고마워서.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났다. 못해주는 것이 많아서, 오랜 시간을 혼자 내버려둬서, 너무 오랫동안 속을 썩여서, 엄마의 삶에 가장 기대했던 그 순간 역시 아쉽고 속상하게 해서, 엄마의 생이 불쌍하고 가여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워서.
엄마는 나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리고 태생부터 외로움이 가득했던 엄마의 삶이 나로 인해 행복했다고 했다. ‘나로 인해’ 행복하다는 말이 나에게는 더없는 짐이었다. 그럼 내가 없으면 엄마의 삶에 남는 건 뭐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단 한 번도 내뱉을 수 없었지만, 태생부터 혼자여서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탔던 엄마는, 스스로 그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롯이 나에게 기대어 왔다.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는데, 나로 인해 행복하다는 엄마의 말은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과연 완전한 행복일까 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를 앉혀두고,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로 시작하던 구구절절한 사랑고백을 감당해내기에 나는, 어리고 철이 없고, 또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다.
엄마의 삶과 마음을 외면하고 혼자 큰 줄 알고 잘난 줄 알던 이십대가 끝날 무렵, 엄마는 병원에 들어갔다.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어쩌면, 나의 내일에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막연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 상실감이, 그간 내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늘, 내 뒤에 있어주었다는 그 사실을, 서른 살 새해를 병실에서 맞이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제, 내가 엄마에 대해 기록할 차례이다.
3개월로 예상했던 엄마의 병원 생활은 급격히 저하된 컨디션에 여러 차례 수술이 미뤄지고, 지리멸렬한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 왔다. 일을 쉬고 간병인을 자처해 병상아래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던, 반년 남짓의 간병생활을 하는 순간들에도 나는, 그동안 엄마에게 못했던 죗값을 이렇게 만회할 기회가 생겨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합리화와 변명으로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는, 엄마가 살지 못했던 삶을 내가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는데 왜 엄마의 삶을 대신 살아달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었다. 엄마는 그냥, 결혼이나 남자로 인해 내 꿈을 접지는 않아줬으면, 본인이 하지 못했던 공부를 계속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의 끝에는 늘, 더 많은 지원을 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는, 나로 인해 삶이 행복했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엄마의 삶을 내게 답습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이러니했다. 결국은 엄마도, 나로 인해 온전히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을 거야. 라고 못돼 먹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서른, 내 삶의 터닝포인트였던 시기, 짧지 않았던 간병생활이었는데 이제와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엄마랑 오랜 시간을 한 몸처럼 붙어 있었던 것.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 혈관을 잡지 못해 온 핏줄이 멍들고 앙상해진 엄마의 팔과 다리. 가만히 있어도 이유 없이 눈물이 나, 엄청나게 울어댔던 시간. 나에게 미안하다고 혼자 화장실을 갔다 쓰러진 엄마를 보며 화를 냈던 나. 그런 나를 잡고 울던 엄마.
단편적인 시간의 이미지들의 편린 속에, 단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 순간들의 나는 부끄럽게도, 정말 진심으로 그동안 속 썩인 엄마에게 만회할 기회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거다.
기적적으로 엄마는 살아났고, 나는 엄마에게 나와 동생이 아닌 본인의 삶을 찾으라고 했다.
엄마는, 연년생인 우리가 수능을 볼 때, 다시 수능을 보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부자집 막내딸로 태어난 엄마는, 기억도 없을 무렵 친엄마를 잃고, 계모 밑에서 핍박을 받으며 자랐다고 했다.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는 말에 양초를 켜놓고 공부하다 머리를 홀랑 태워먹기도 했다고 했다는 레퍼토리를 학창시절 내내 들어왔지만, 못돼먹은 나는 그래서 뭐, 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절실함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어린 아이였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엄마는 여러 대학에 합격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엄마 앞으로 남겨졌던, 부자인 할머니의 유산까지 노름으로 죄다 탕진했고, 엄마는 결국 대학을 포기했다고. 그래서 꼭, 자식들이 자라면 함께 수능을 다시 보는 것, 그게 아빠와 결혼 할 때의 조건이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삶에 치여 수능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퇴원한 엄마에게 새 삶을 살아보라고, 공부가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했다. 엄마는, 이제는 그런 것 따위 다 시들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하고, 정해진 날마다 하루 종일 병원에 가서 갖은 검사를 해야 하고, 엄마의 정해진 수명은 길어야 몇 년, 고작 몇 년이 연장된 것뿐이라고, 살아났다고 해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너무 아프고 회복을 할 때는 몰랐던 것들이 엄마의 말에 의하면 ‘조금, 살만해 지고 나서야’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살만해 지고 나서야, 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을 지켰다.
약의 부작용에, 제한된 삶의 방식이 생기고 나자 엄마는 다시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많이, 자주.
약의 부작용을 핑계 삼아 두어 달에 한두 번꼴로 엄마는 전화기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마른침만 삼켰다. 내게 전화를 해서 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엄마는 이불속에서 감내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엄마의 우울이, 단순히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에겐 다만, 핑계를 댈 수 있는 거리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엄마는, 그때 수술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휴대폰을 잡고 울었다. 적어도, 동생의 신장을 받은 것은 너무 잘못한 선택이었다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동생의 신장으로 살아가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에는 할 말이 없었고, 다시 화가 났다.
살고 싶어 발버둥 쳤으면서, 사는 게 너무 외롭고 힘들다는 엄마의 몇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 서늘하게 칼로 베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퇴근하고 지하철 환승을 하기 위한 어느 역에서, 사는 게 너무 외롭고 힘들어. 동생 걸 받지 않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수술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몇 년 전의 동이 트던 새벽이 떠올랐다.
웃음이 섞인 물기 어린 목소리로, 어슴푸레한 새벽에 졸업반이던 나는, 자취방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지독한 우울증이 내 삶을 넝마처럼 갉아먹던 시기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엄마와 애틋하지 않았고, 오롯이 나의 삶만이 힘겹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엄마. 죽으려고 했는데, 죽어지지 않았어. 죽고 싶어서 약을 먹었는데, 생각처럼 죽는 게 쉽지 않았어. 그래서 전화했어. 그렇게 말을 했다. 엄마의 반응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화를 하던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약에 취해있었다.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었나. 그런 꿈을 꾸었다고 했었나. 괜찮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퇴근길 지하철에서, 대답 없는 수화기 너머로 엉엉, 아이처럼 울기만 하는 엄마에게 나는 음, 어, 응, 외의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통화를 하는 날에 엄마는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대체, 내게 뭐가 그토록 미안하다는 것일까.
살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엄마도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정말로, 울고 싶어 졌다.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울기에 눈물이 많이 말라버린 나는, 텅 빈 집으로 돌아와 나를 반기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아직도 나는, 엄마에게 못해주는 것이 많아서, 엄마가 나에게 늘 미안해하기만 해서, 나와 동생이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엄마의 삶이 안타깝기만 해서,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이제, 내가 엄마에 대해 기록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