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해 - 서로를 돌보며 존엄한 삶을 가꾸다
최정은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들의 우정과 해방의 공간, 윙의 비빌 언덕과 그 언덕에 핀 들꽃들

 

감옥같구나..’ 나는 화들짝 놀라며 금방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2주간 전국을 돌며 14곳의 선도보호시설을 방문하고 종사자와 시설 이용자를 면담하며 내년도 지원이 필요한 사업이 뭔지 확인하는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울의 은성원을 방문한 날이었다. 호기심을 반짝이며 철제문 사이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도, 나를 반기는 최정은선생의 환대도 무척 어색했던 시간이 기억난다.

그렇게 은성원은 내게 내가 맡은 업무(성매매방지업무)의 성격만큼이나 무거운 곳이었다.

 

이 책(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해)을 읽고 나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저자인 최정은선생에게 독자 서평을 써서 책을 알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건만 책을 다 읽고도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글을 써서 무언가를 보태기에는 내가 처음 은성원을 방문했던 2001년부터 지금까지 그 안에서 살아온 모든 이들의 시간이 내게 너무 벅찼다. 데레사원, 은성원, 윙으로 이어지는 70년 세월의 이야기가 매일같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윙뿐 아니라 다른 시설들 자활지원센터, 긴급쉼터, 상담소... -에 종사하며 성매매산업으로 고통받는 피해여성들을 지원하던 그 활동가들과 그녀들에 대한 생각이 오랫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쥐꼬리만한 국가의 지원으로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만나고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활동가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은성원에서 윙으로의 발전은 최정은선생 개인의 능력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반성매매 현장에서 뼈를 녹이며 활동했던 사람들의 노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그렇게 20여년을 보내왔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처음 업무를 맡았던 공무원으로서 한편으로 미안하고 한편으로 너무 고맙다. 기특하다.

 

나는 이 책의 저자 최정은선생을 인생에서 세 번 만났다. 2001년 여성부로 전입와서 처음 윤락행위등방지법(지금의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선도보호시설 운영 지원과 피해자 보호 등의 업무를 맡았고, 최정은선생의 부친이신 고 최주찬선생이 원장으로 계시던 때였다. 반짝이는 눈빛의 단발머리 소녀같았고 나보다 한참 어린 줄 알았다. 1년에 2번 전국의 선도보호시설 운영자들을 모아 다양한 애로사항, 지원필요사항, 새로운 사업구상 등 도움을 청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마련하였는데 가장 젊은 그이가 적격일 것 같아 총무라는 직함을 제안했다. 그동안 보건복지부에서 개밥에 도토리 신세도 못되었던 윤락행위등방지법선도보호시설은 여성부로 업무가 이관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되면서, 그리고 여성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낙인찍던 윤락행위라는 용어부터 중립적인 성매매로 변경되면서, 그간 감추어졌던 다양한 문제와 그 해결 방법들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최정은선생은 물만난 고기처럼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2008, 내가 두 번째로 최정은선생을 만났을 때, 내가 알던 은성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2006년 시설이름을 윙(WING)으로 바꾸고 내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해나가고 있었다. 나를 초대해서 나만을 위해 PPT로 윙의 현재 모습, 앞으로의 비전을 브리핑해 주던 그녀의 상기된 얼굴...놀라웠다. 단지 공무원으로 내게 주어진 법과 규정에 따라 약간의 개선만을 위해 현장과 사람들을 만나서 지원을 해 주었던 그때(2001)로부터 불과 7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는 정말 놀라운 발전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을 만난 것은 2016년 겨울. 박근혜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전날 집회 참가차 지방에서 올라왔다 내려가는 다음날 아침 용산역. 그녀는 항암에 좋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파리들이 잔뜩 담긴 봉지를 들고 역으로 나왔다. 그날 그녀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 그 따뜻한 손도...

 

내게 은성원은 감옥의 이미지로 시작되어서 여성들의 우정과 해방, 발랄한 에너지가 분출하는 거대한 빛으로 남았다. 최정은선생의 이 책으로 인해 일개 공무원이었던 나는 내가 담당하는 업무의 지원대상이었던 그녀들을 존엄한 한 사람의 단독자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자신이 존엄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다시는 자신의 존엄을 다치지 않을뿐더러 타인의 존엄도 해치지 않는다. 정말 고맙다.

 

언니!”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고음의 목소리로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일을 꾸며대고 싶은지 쉬지 않고 종알거릴 것이다. 여자들의 우정으로 똘똘 뭉쳐 기댈 언덕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등을 아낌없이 내밀 것이다.

 

데레사원, 은성원, 윙의 비덕과 비덕에게 기대었던 작은 들꽃, 나무, 돌맹이,,그리고 때로는 비덕의 비덕이 되어주었을 그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잘 살아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언덕은 가파른 길을 오를 때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친구들의 언덕이 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