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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평점 :
고백하건대, ‘잘하면(!)’ 나도 건축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재수를 선택하면서 ‘문과’로 전과를 하기 전에, 건축공학과를 다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인문 기질’이라서 건축(공학과)에는 맞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재수를 선택하고 ‘문과’로 전향해 어문학과를 다니게 되었다. 아마도 그런 결정에는 ‘건축과 인문’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것, 서로 관련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깔려 있었던 듯하다(무식하게스리!).
스무살 남짓 때 잠시나마 건축에 대해 품었던 꿈은 그후로는 다시 꾸어지지 않았다. 그후로도 나는 인문 기질이었으므로! 건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의 집을 고쳐주는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였다. 건축에 문외한이었던 나였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건축가를 꿈꾸던 사람으로서, ‘러브하우스’를 보면서 매번 들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건축이란 게 꼭 저렇게 실내 인테리어 위주, 기능 위주의 것만은 아닐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밥벌이의 고난함 때문인지 그런 생각 역시 잠시였던 듯싶다. 그렇게 한참을 살다가 얼마 전에, 인문학자 도정일 선생이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를 ‘건축의 인문학과 건축의 사회학을 진지하게 사색하는 한 사람의 건축가’라고 평가하며 “이런 건축가도 있었나 싶다”고 말한 것을 알게 되었다. ‘건축의 인문학’이라!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인문학자의 입에서 나온 평가임에야, ‘건축과 인문’을 동거 불가능한 말의 조합으로 알고 있던 인문 기질의 나로서도 정기용이라는 건축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감응의 건축: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은 내게 ‘건축과 인문’의 훌륭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문학적 정신이 바탕이 된 건축이야말로 제대로 된 건축임을, 아니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 일상의 삶을 짓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다.
누군가가 “인문(人文)은 곧 인문(人紋)”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의 무늬(人紋)’를 살피는 공부가 ‘인문학’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건축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사람의 무늬가 없는 건축물은 사람들을 잠시 가두어두는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다. 사람의 무늬는 비단 사람만의 무늬가 아니라 ‘땅의 무늬’, ‘하늘의 무늬’ 등 건축을 둘러싼 전체 ‘풍경의 무늬’를 포함한다. 사람의 무늬는 땅 위 그리고 하늘 아래에서 주변 풍경과 함께 살아가는 데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무늬가 있는 건축에는 삶의 흔적(역사)이 있다. 건축가 정기용이 말하는 ‘감응’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사람의 무늬가 있는 건축물들, 감응으로 지어진 건축물들……. 등나무가 관중석에 그늘을 드리운다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등나무운동장, 홀수 날에는 남탕이 되고 짝수 날에는 여탕이 되는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의 목욕탕,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부남면의 별 보는 집, 그리고 특히 의자가 ‘ㄱ’자여서 사람들이 나란히가 아니라 마주 앉게 되어 서로의 시선이 은근히 교차되고 낯선 사람끼리도 “어디까지 가십니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 무주…….
나는 사람의 무늬가 있는 건축물을 <감응의 건축>에서 만났다. 언젠가는 그 사람의 무늬가 있는 건축, 감응의 풍경을 만나러 무주로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