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라 서문문고 258
막스 프리쉬 지음 / 서문당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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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의 독일어권 문학의 結晶이라고 할 수 있는 스위스 출신의 두 작가가 있는 데 바로 뒤렌마트와 막스 프리쉬이다. 이 둘은 모두 극작가이면서 동시에 소설가로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킨 인물들이다. 그러나 뒤렌마트의 경우 통렬한 풍자와 그로테스크하고 기발한 구상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일침을 가한 반면, 막스 프리쉬의 경우는 좀 더 세련되고 섬세하고 유려하게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다루고 있다.

<안도라>는 프리쉬의 대표적인 희곡으로서, 서사극의 형태로 매 경(장면)마다 증언대가 설치되고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나와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주인공인 유대인 안드리가 처형되었다는 결론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극은 사건의 진행과정만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관객(독자)은 서사극의 특징인 비판적 거리와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단계까지 고양되며 극에 참여하게 된다.

작품에서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간의 편견을 다루고 있지만, 안도라라는 곳이 프리쉬의 말처럼 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한 것이고, 따라서 이 세상의 어느 곳이든 안도라와 같은 모습을 지닌 보편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군중의 상이란 것 역시 시대를 넘어서, 공간을 초월해서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군중의 그릇된 편견에 의해서, 한 사람을 향해서 만들어 놓은 상에 의해서, 한 사람은 파멸의 길을 가게 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군중 속의 개개인은 거대한 무리 뒤에 숨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작품의 처음과 끝에서 바르플린이 교회 벽에 흰 칠을 하는 것은 군중의 이러한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소나기로도 교회의 벽은 돼지 피처럼 시뻘겋게 변해버리고' 그 참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리고 안드리가 희생되어서도 다시 그 사건에 대해서 모두들 책임을 회피한 채 다들 자신들만의 일상으로 숨어 들어가듯이, 항상 군중은 그 실체를 감춘 채 또한 그 구성원 개개가 인지하지 못한 채 오로지 거대한 힘 뒤에서 서로들 티 묻지 않은 사람인 양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유대인도 아닌 안드리에 대해서 안도라의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유대인의 상과 편견을 만들어서 한 사람을 바라보고, 안드리에게 그러한 모습일 것을 간접적으로 종용을 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당시 유럽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들이 작품에서 드러난 것으로, 인색하고 지나치게 돈만을 알고, 그래서 상업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이 최선이고, 지나치게 명예욕에 넘치며, 무감각하고 무감정해서 농담이나 생의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언제나 비겁하고 겁쟁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 숙련되지 못한 미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편견들은 극에서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아닌 의사나, 목수, 주인, 군인처럼 신분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대사에서 묻어 나오게 된다. 이는 다수의 군중을 의미하기 위한 프리쉬의 계획된 인물설정임을 살펴볼 수 있고, 또한 바로 그들이 상정한 안드리에 대한 상은 안도라 사람들의 성향의 투영으로서 안드리를 속죄양 혹은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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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라 서문문고 258
막스 프리쉬 지음 / 서문당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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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드리 자신은 처음에 자아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즉 조직 속으로의 소속을 통한 자아의 확인을 꾀하지만, 목수의 일자리를 얻는 것에서도, 축구부에 가입하는 일에서도, 그리고 바르플린과의 결혼의 계획에서도, 사회가 혹은 군중이 만든 상과 편견에 의해서 거부되어지고서 끝내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믿어버리고 인정해버린다. 카프카의 성에서와 같이 끊임없이 하나의 조직 속으로 자신을 넣으려고 하지만, 끝내는 거부당하고 거기에서 자아의 정체성은 상실되고, 파멸로 이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프리쉬의 일기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드는 제작자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만든 혹은 사회가 만든 상이나 편견이 가진 실로 오만하고 왜곡된 힘을 느끼게 하고 각성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안드리는 검은나라의 침입으로 유태인 검열에 걸리게 되고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모든 인물들의 증언대의 부분에서는 '일이 그렇게 된 데에는 자신은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은 단지 안드리 즉 유대인에 대해 이러한 말만을 했을 뿐, 자신들이 직접 안드리를 처형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기에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실제 안도라가 스위스를 모델로 하고 있고, 검은나라가 나치 독일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프리쉬 자신이 스위스 국민의 성향에 대해 비판하던 것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상황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의미를 전하고 있다.

우리의 주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수 없는 투영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장 초라하고 열등적인 성향을 하나의 희생양을 선정하여 고정된 상을 만들어 버리고 있다. 한사람에 대한 평가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다른 사람의 실체를 확정시켜 버린다. 프리쉬는 확정된 삶은 이미 죽은 삶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우리는 그렇게 다수의 혹은 군중의 속에서 수없이 많은 상을 만들고서는 누군가를 죽음의 삶으로 몰고서 어떠한 권한도 없이 그들의 참된 정체성을 빼앗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책임감이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행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들 그렇게 말했기에 나도 그냥 그렇게 했다'는 군중의 등뒤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프리쉬는 인간의 상을 만들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일기에서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는 것에 있어서 최소한으로 밖에는 진술할 수 없다는 것에 사랑의 경탄이 존재한다고 한다.' 즉 어떠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타인을 대할 때에 생기는 수없이 많은 그릇된 상이 사랑에서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사랑을 하게 되면 언제나 상대방이 무한한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생각하고, 따라서 그는 지금 현재 어떠한 고정된 상을 가질 수도 없고, 만들어질 수도 없는 유동적이고 살아있는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만이 그때 그때의 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안도라>는 현대에 등장한 군중이란 거대한 힘에서의 개개의 인간들이 만드는 수많은 상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서사극이 주는 독자(관객)의 인식의 촉구라는 적극적인 효과가 맞물려서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서 어떠하다는 말을 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고정된 삶(죽음의 삶)으로 몰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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