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일기 - 산의 시간을 그리다
김근희.이담 지음 / 궁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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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폭 아래로 다소곳이 두 팔 내려 절하는 얼레지. 나뭇잎 우산 펼쳐 들고 그 아래서 피리 따라 머리를 꼿꼿이 세운 코브라같은 천남성. 숲속 가지 위 큰유리새의 깨질듯한 슬픔. 온갖 풍상을 견뎌냈을 수피와 드러난 뿌리의 질감은 마음마저 긁어내듯 처연해서 아름답다.


꽂과 나비 그리고 자연. 있는 그대로의 초상을 그리려 노력한 김근희, 이담 부부 화가의 설악산 일기-산의 시간을 그리다/궁리/2022.5. 장장 10년의 설악 생활을 통해 체험한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을 화폭에 담았다


새색시 같은 수채화, 단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유화, 투박함과 섬세함이 교차하는 왁스페인트의 슬픈 질감. 이렇듯 많은 자연의 벗들을 모르고 무심케도 대했구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작은 존재의 자태는 외경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맴돌게 하고 그림은 말을 하며 글은 담백한 황태해장국 맛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린 초록별 지구의 벗들과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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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 나날이 의로움을 향해 나아간 사람 다나카 쇼조의 삶과 사상 1841~1913 고개를 넘어 마을로 1
고마쓰 히로시 지음, 오니시 히데나오 옮김 / 상추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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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후라락 읽게 된 오늘의 책.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다나카 쇼조의 삶과 사상(상추쌈)
서양의 근대를 넘어 아시아의 새로운 문명을 밝히고자 했던 다나카 쇼조(1841~1913).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 p229
간디 최시형 함석헌 등 아시아 민중해방 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그의 생명평화 사상이 인상깊다. ...
동학을 보는 눈도 남다르다. 1894년 당시 일본 중의원 의원이었던 쇼조는 '조선잡기'란 글에서 ˝동학당은 문명적이다. 12개 조 군율인 덕의를 지킴이 엄격하다. 인민의 재물을 빼앗지 않고...병력으로 권력을 빼앗아 재물을 취하되 그밖의 것을 다스림이 공평하다.˝p105
당시 매천 황현, 후쿠자와 유키치 등 식자층이 동학도를 ‘적' '폭도‘ '오합지졸‘로 규정한 것과는 남다른 인식을 보여준다. 특히 전봉준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죽음에 새싹을 짓밟았다며 통탄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근대의 미몽, 문명의 폭력성과 맞섰던 생명사상가 다나카 쇼조.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1871~1911)와의 의견차이를 다룬 p57~61도 흥미롭다. 근대의 그늘이 깊이 드리워진 현대의 일본. 최시형과 어딘가 닮아 보이는 다나카 쇼조가 동시대 일본에 있었다는 건 축복이 아닐까? 신자유주의를 넘어 아시아 민중의 연대를 위해.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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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안지숙 지음 / 산지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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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이 그리는 인물들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백안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불안정 노동과 불안정한 삶에 놓여있다. 영혼이 탈곡되어 나가는 여성들의 신난한 삶을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은 여러 단편을 통해 이야기한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허울 좋은 프리랜서에 임금 떼이는 계약직. 그리고 장애인여성, 집안에서 버림받은 여성, 자식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지만 자식에게 버림받는 여성. 모순은 심란하게도 켜켜이 쌓여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마음은 불편하다. 별다른 해법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여성들의 삶을 드러낼 뿐이다.

 

안지숙 작가는 말한다. 치열한 고민도,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들의 애환을 더듬었다고도 차마 말 못하겠다고. 일곱 편의 소설은 내 상처에 내가 무너진 이야기들이라고. 지친 영혼들에 위로와 희망은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치유는 무너진 상처를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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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장례식날 생긴 일
모니카 마론 지음, 정인모 옮김 / 산지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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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의 관조와 성찰이 돋보이는 모니카 마론의 작품이다. 시어머니인 올가장례식에 가면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구조. 이혼한 남편과 딸, 시어머니에 얽힌 이야기. 애완견 니키와 얽힌 이웃과의 대화, 비밀경찰 슈타지로 대변되는 통일 전 동독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등등. 작가의 문제의식, 사유의 깊이가 유려한 문체 속에 녹아든 느낌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란 관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짧은 소설을 접으며 떠오르는 문장은 이것이다. “인간은 유감스러운 존재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누가 인간의 부재를 유감스러워할까?”

 

 

밑줄을 그으며

아이는 우리의 근원적 존재이다. (중략) 태초의 인간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p18

 

엄마는 순수한 행복의 자연스러운 종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다. p22

 

나는 마치 올가의 장례식이 아니라 미지의 희망의 장소로 가는 것처럼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p39

 

하관 때 흘리는 성스러운 눈물에 나는 곤혹스러웠다. (중략) 죽음은 눈물로 해결되지 않는데 눈물은 반향 없고, 멍하니 따를 수밖에 없는, 모든 감정이 얽히고설킨 허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p43

 

길을 잘못 든 것이 축복의 오아시스로 나를 인도한 것 같았다. p44

 

뭉크의 <절규>를 생각해봐요. (중략)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 삶은 올바른 빛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p55

 

그건 구더기가 바른 길 가는 게 낯설 듯, 절망이 낯선 그런 사람들의 논리이지요. p61

 

위로라는 건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죄는 항상 남아 있어요. p66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올바른 인간으로 투쟁해 나가는 데 쓰기로 한 그의 결단에는 그가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자기 실책을 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p69

 

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를 죽이는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p72

 

사람들은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알고 있었다. 하루살이는 아침, 점심, 저녁 밤 시간을 알았을까? 빙하시대부터 그다음 시대까지를 측정하고 그 눈에서는 인간이 하루살이처럼 되는, 정말 인식할 수 없는 그 거대한 존재가 바로 바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가끔 했다. p84

 

원하는 걸 외칠 수도 없는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어? p98

 

그들은 우리 땅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에서, 우리의 청춘에서, 우리가 그때까지 사랑했던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쫓아냈다. p101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한 세계를 다른 세계와 나누던 장벽이었는데, 갑자기 의미 없는 담에 불과하고, 방금까지 영원한 현재로 보였던 한 과거의 상징물이었다. p102

 

인간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누가 인간의 부재를 유감스러워할까,p114

 

티보어 데리(헝가리 작가. 루카치가 이 시대 우리 인간의 위대한 서사작가로 극찬)의 회고록에 나오는 한 구절을 기억했다. 그는 인간에 의해 분별없는 폭력과 불손으로 삶의 자율성을 완전히 유린당한 모든 동물을 대표해서 자기 개와 친분을 맺고 화해를 시도했다. p121

 

티보어 데리의 말처럼 삶의 자율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개를 섬기는 것이었다. p122

 

올가가 자기 손을 내 손에 올렸다. 때로는 옳은 것이 없을 수도 있어.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거짓과 또 다른 거짓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그러면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가 없지. p137

 

항상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고 모든 행복 뒤에는 또 대가를 치러야 할 불행이 도사리고 있어. 아그네스가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인간은 늘 유감스럽다는 거야. (중략) 인간이 어떤 나은 것을 정해도 어딘가 결함이 있고, 어떤 불행한 상황이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지. 올가가 말했다. p140

 

동물들은 어떤 것도 그릇되게 하지 않아. 잘못을 저지르지 않지요. 새는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 겨울을 나고 늑대는 무리의 지도자를 받아들일 줄 알고, 대장이 늙고 약해지면 물어 죽여버리지요. 동물의 어미는 연령에 맞춰 새끼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고도 새끼를 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은 복잡한 일들을 항상 즉시 경청해야 하고 그러면서 늘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어요. p141

 

결정하는 사람은 잘못 결정할 수도 있고 그 대가로 책임을 져야 해요. p145

 

올가와 브루노는 내 삶에 속했다. 심지어 교도관도 어떤 죄수의 삶에 속하듯, 에리히과 마르고트도 나에게 속했다. 하지만 자기 고백처럼 이 나쁜 녀석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p166

 

사람들이 무엇보다 예술에 경도되는 것이 자신의 살해 욕구와 권력에 대한 환상을 철장에 들어가지 않고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할 때가 있어요. p178

 

니키가 섰고, 떨면서 주둥이를 들고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니키, 나의 개, 그 녀석은 단지 오늘만 있었다. 오늘은 지나갔다. 가로등의 흰빛이 출구로 보이는 앞쪽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빨리 걸었고 아침에 올가와 앉았던 벤치를 여전히 불안한 눈길로 생각했다.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내 자동차를 발견했다. 이제 번호판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갔다.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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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걷다 - 소설 속을 걸어 부산을 보다
조갑상 지음 / 산지니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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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걷다> 소설을 통해 보는 부산 속 어제와 오늘의 풍경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서른 즈음에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 정착하기 전까지 전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부산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더군요. 30여년을 살았으면서도.


책머리 글처럼 “기억할 공간이 없다면 지나간 시간도 무화”되는 법이겠죠. 부산에 그리 오래 살았으면서도 기껏 해운대니 태종대니 자갈치 시장 정도 말하는 걸 보면, 저도 외지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기억할 공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제가 오래 살았던 곳은 온천장이란 동네였습니다.


부산을 동서로 구분해 예전의 중심(동래, 온천장)이 일제시대를 거쳐 남포동, 중앙동으로 변모해 간 얘기가 흥미롭더군요. 전차와 온천장, 동물원, 시장 등등. 곰삭은 부산의 묘미를, 살면서도 이후에도 잘 몰랐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스파쇼핑이 있던 자리가 해방직후 경남건국준비위원회 발족모임이 열린 역사적 장소라니. 참 가까이 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이었습니다.


해운대에 관한 소설 속 얘기도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문장강화>란 책으로 유명한 월북작가 이태준 선생의 해운대와의 관계는 좀 의외였습니다. 아! 그랬구나. <경성트로이카>나 <이관술> 등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남로당 계열의 잊혀진 혁명가의 발자취가 이곳에도 묻혀 있었구나.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저도 머릿속 추억여행을 떠나는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부전역에서 해운대로 동해남부선에 몸을 맡긴 기억들. 철로가에 살면서 ‘칙칙폭폭’ 내달리던 증기기관차(관광용이었지만)의 추억들도 떠올랐습니다. 해운대 신도시를 건설할 때 질통을 매고, 시멘트를 져 나르던 막노동의 아픔도.


‘옛날 한시를 읽는 맛’을 불러일으킨 해운대 백사장의 풍경은 어느새 거대한 고층건물들로 채워졌습니다. 과거의 운치가 속절없이 변하는 삭막한 도시의 풍경.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남는다지만 추억할 사람이 없다면 이 공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조만간 부산 행 기차에 몸을 실을 때 <이야기를 걷다>란 책은 훌륭한 길동무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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