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의 장례식날 생긴 일
모니카 마론 지음, 정인모 옮김 / 산지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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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의 관조와 성찰이 돋보이는 모니카 마론의 작품이다. 시어머니인 올가장례식에 가면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구조. 이혼한 남편과 딸, 시어머니에 얽힌 이야기. 애완견 니키와 얽힌 이웃과의 대화, 비밀경찰 슈타지로 대변되는 통일 전 동독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등등. 작가의 문제의식, 사유의 깊이가 유려한 문체 속에 녹아든 느낌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란 관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짧은 소설을 접으며 떠오르는 문장은 이것이다. “인간은 유감스러운 존재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누가 인간의 부재를 유감스러워할까?”

 

 

밑줄을 그으며

아이는 우리의 근원적 존재이다. (중략) 태초의 인간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p18

 

엄마는 순수한 행복의 자연스러운 종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다. p22

 

나는 마치 올가의 장례식이 아니라 미지의 희망의 장소로 가는 것처럼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p39

 

하관 때 흘리는 성스러운 눈물에 나는 곤혹스러웠다. (중략) 죽음은 눈물로 해결되지 않는데 눈물은 반향 없고, 멍하니 따를 수밖에 없는, 모든 감정이 얽히고설킨 허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p43

 

길을 잘못 든 것이 축복의 오아시스로 나를 인도한 것 같았다. p44

 

뭉크의 <절규>를 생각해봐요. (중략)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 삶은 올바른 빛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p55

 

그건 구더기가 바른 길 가는 게 낯설 듯, 절망이 낯선 그런 사람들의 논리이지요. p61

 

위로라는 건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죄는 항상 남아 있어요. p66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올바른 인간으로 투쟁해 나가는 데 쓰기로 한 그의 결단에는 그가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자기 실책을 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p69

 

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를 죽이는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p72

 

사람들은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알고 있었다. 하루살이는 아침, 점심, 저녁 밤 시간을 알았을까? 빙하시대부터 그다음 시대까지를 측정하고 그 눈에서는 인간이 하루살이처럼 되는, 정말 인식할 수 없는 그 거대한 존재가 바로 바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가끔 했다. p84

 

원하는 걸 외칠 수도 없는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어? p98

 

그들은 우리 땅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에서, 우리의 청춘에서, 우리가 그때까지 사랑했던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쫓아냈다. p101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한 세계를 다른 세계와 나누던 장벽이었는데, 갑자기 의미 없는 담에 불과하고, 방금까지 영원한 현재로 보였던 한 과거의 상징물이었다. p102

 

인간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누가 인간의 부재를 유감스러워할까,p114

 

티보어 데리(헝가리 작가. 루카치가 이 시대 우리 인간의 위대한 서사작가로 극찬)의 회고록에 나오는 한 구절을 기억했다. 그는 인간에 의해 분별없는 폭력과 불손으로 삶의 자율성을 완전히 유린당한 모든 동물을 대표해서 자기 개와 친분을 맺고 화해를 시도했다. p121

 

티보어 데리의 말처럼 삶의 자율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개를 섬기는 것이었다. p122

 

올가가 자기 손을 내 손에 올렸다. 때로는 옳은 것이 없을 수도 있어.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거짓과 또 다른 거짓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그러면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가 없지. p137

 

항상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고 모든 행복 뒤에는 또 대가를 치러야 할 불행이 도사리고 있어. 아그네스가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인간은 늘 유감스럽다는 거야. (중략) 인간이 어떤 나은 것을 정해도 어딘가 결함이 있고, 어떤 불행한 상황이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지. 올가가 말했다. p140

 

동물들은 어떤 것도 그릇되게 하지 않아. 잘못을 저지르지 않지요. 새는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 겨울을 나고 늑대는 무리의 지도자를 받아들일 줄 알고, 대장이 늙고 약해지면 물어 죽여버리지요. 동물의 어미는 연령에 맞춰 새끼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고도 새끼를 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은 복잡한 일들을 항상 즉시 경청해야 하고 그러면서 늘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어요. p141

 

결정하는 사람은 잘못 결정할 수도 있고 그 대가로 책임을 져야 해요. p145

 

올가와 브루노는 내 삶에 속했다. 심지어 교도관도 어떤 죄수의 삶에 속하듯, 에리히과 마르고트도 나에게 속했다. 하지만 자기 고백처럼 이 나쁜 녀석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p166

 

사람들이 무엇보다 예술에 경도되는 것이 자신의 살해 욕구와 권력에 대한 환상을 철장에 들어가지 않고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할 때가 있어요. p178

 

니키가 섰고, 떨면서 주둥이를 들고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니키, 나의 개, 그 녀석은 단지 오늘만 있었다. 오늘은 지나갔다. 가로등의 흰빛이 출구로 보이는 앞쪽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빨리 걸었고 아침에 올가와 앉았던 벤치를 여전히 불안한 눈길로 생각했다.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내 자동차를 발견했다. 이제 번호판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갔다.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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