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의 삶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삶에 객관적인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한다. 그런 주장은 이중으로 힘겨운데, 우선개인의 삶 외부에 의미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전에 신을 죽였지 않은가?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그러므로 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바깥에 있는 의미의 근원을 찾은 뒤에는 더 큰 골칫거리에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우열을 정할 수 있게 된다. 의미의 근원은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된다.
그때 우리는 비둘기를 관찰하며 기뻐하는 일 따위에는 가치가 없다고, 그런 일에 허비한 인생은 한심한 인생이었다고 사내를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많은 직업들을 같은 논리로 비난할 수 있게 된다. 삶의의미에 있어서도 빈부 격차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를 대할 때에는 분노에 휩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박태웅이 말한 복수에는 동의한다는뜻일까? 정의는 제도화한 복수에 불과할까? 연지혜는 정의는 복수와달라야 한다고 믿었지만 자신 있게 그런 주장을 펼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연지혜는 예감했다. 자신의 미래를흘끗 본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너는 여성 청소년 범죄를 담당하게 돼.
그리고 거기서 너무나 끔찍한 사건을 맡는다. 너는 분노할 테고, 이성을 잃을 거야. 분노가 너를 덮칠 거야.
그때, 네가 바라는게 정의인지 복수인지 알게 될 거야.
선택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