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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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움트는 생명으로 가득 찬 봄이 왔다. 따뜻한 햇볕과 초록이 무성해지는 가로수들로 기운이 충만해진다.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는 우리 곁에 있고, 기후 위기 속에서 꿀벌은 사라지고 있으며,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봄의 제전: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은 모더니즘의 시초로 대표되는 발레 <봄의 제전>을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의 진행과 그 전장 속에서 펼쳐진 이야기들을 파고들어 간다. 현대 예술의 추상과 아방가르드를 전쟁과 연결 지은 점이 주목할만하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은 모더니즘의 시초로, 어떤 감상이나 도덕적 목적은 결여된 채 에너지와 환희만을 강조했다. 극에서 다산성과 생명을 의미하는 처녀는 제물로 바쳐져 열렬히 춤을 추다 쓰러지고, 그 죽음은 희생이라는 명분 아래 영예로운 것이 되었다.

 기교를 제거한 그의 무대에서는 내용보다는 태도와 스타일이 더 중요했다. 그건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과 불특정하고 순간적인 움직임, 파도 거품처럼 거세게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예술이었다.


 <봄의 제전>은 여기서 세계대전의 발발을 잡아낸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아방가르드적 열망, 이성과 합리보다는 에너지가 끓어 넘치는 세계적 움직임 속에서, 전쟁은 민족의 자존감과 연결되고 삶으로부터의 휴가이자 생기와 에너지, 예술 그 자체와 연결된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은 삶보다는 스크린에 더 어울린다.”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1차 세계대전의 진행을 설명하는 부분은 암울함 속에 희열이 자리 잡고 있다.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휴전에 대한 이야기, 전쟁의 참혹에 너무도 익숙해진 병사들, 단절된 전장과 일상 그리고 전쟁 후 사회로 돌아가게 된 병사들까지의 흐름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공포의 참상도 일상으로 탈바꿈하고 권태를 가져올 수 있다.”


 전쟁이라는 스펙터클의 연속 속에서, 군인들은 터지는 포탄과 동료의 죽음에도 점차 무뎌졌다. 그저 전쟁을 헤쳐 나갈 뿐, 그 속에서 생각은 유해무익했고 다들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고 비슷하게 기도하며 전쟁을 버텨냈다. 전장 속 사람들이 목도하는 파괴의 현장은 이미 초현실적이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심지어 매혹적인 구석이 보이기까지 하는 곳이 되었다.

 <봄의 제전>은 드라마처럼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1914년 이전 유럽의 문화생활과 전쟁의 진행과 그의 여파,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과 국가들의 흥망을 짤막하게 전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와 함께 전쟁과 모더니즘을 조명하는 점은 새롭고, 전쟁의 묘사는 지루하지 않고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롭다.


삶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인식에서 비운동적 대상 같은 것은 없다.”
 -
미래주의자 움베르토 보초니


 얼어붙은 겨울을 지나 새로운 움직임의 봄. 그리고 우리는 해가 갈수록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봄의 제전> 속 처녀는 제물로 희생되어 죽었지만 그건 명예로운 죽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지는 스펙터클 속에서, 일상과 단절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봄은 오는가. 희생한 자에게도 봄은 오는가. 움직이지 않는 자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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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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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설이고 에세이이며 시로 이루어진 이야기. 어두운 표지를 가진 이 책에서 말하기와 언어는 혼합되며 확장하고 있다. 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만 소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의문이 든다. 계속해서 바뀌는 서술 방식은 낯설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 혼란은 책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책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고 어조는 덤덤하다. 어두운 물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것처럼 잠잠하다. 중간 중간 들어간 도판들은 소설을 갑자기 현실로 개조하며 시선을 건조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 글과 그림들은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책을 덮고 나면 나의 의문과 혼란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장르가 무슨 소용인가소설의 고요한 모습은 바다나 강물에 이는 잔물결에 빛이 반사되는 모습 같다. 그 알알이 반짝이는 모양이 물 위에 떠다니는 진주 같다.

 


 인상적이었던 몇 장면이 있다. 먼저 첫 번째 장에서 어린 화자는 수학을 잘하지만 공집합을 이해할 수 없었다.존재하되 보이지 않으며 결코 발음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공집합이고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13쪽) 

 어린 작가가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일찍 어른스러워져야 했다. 작가의 아버지는 공집합처럼 어린 작가가 이해할 수 없는 수의 세계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해 감옥까지 갔다 온 아버지는 개인적인 삶을 이제는 살아야했다. 그에게 전부였던 우리는 이제 없고 지극히 개인적인 둘레를 위하여, 자신의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야했다. 아버지가 좇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한때 같은 목소리를 내었던 동료들도 이제는 가정을 지키고 자신을 지킨다. 그건 곧 평범한 삶이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잊어야한다. 주변의 그 많은 것들을 잊고, 모른척하며 고독을 견뎌야한다.

 그럼에도 혼자 행진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한 남자의 이야기가 3장에 등장한다.

 


 소설만큼 작가의 말에도 힘이 들어가 있는 책이었다. 아마 이 책은 작가의 말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분명 쉽지 않다고.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진주를 다녀왔다. 열한 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러 진주로 향하던 그날처럼. 진주를 다녀오고 긴 시간을 거쳐 완성된 이 책을 다시 한 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5장의 제목이 이 소설을 간단히 말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당신 뒤에 딸도 받아쓰기를 했습니다.”라고.

 단순히 민주화 운동의 영웅이었던 아버지를 위한 소설이 아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되었고, 당신 곁에 있던 어머니와 아내와 딸의 시선으로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은 한 명이 아니다. 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우리로 나아가 닿는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가르쳐주며 말한다.

뒤돌아보지 말아라.”

 나도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우던 때가 생각난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필요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기와 용기.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는 일. 그건 미행당하는 아버지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써내려간 작가에도 필요한 것이이었다. 작가는 당신, 아버지를 마주하고 글을 썼다. 작가에게 시대와 아버지를 마주하는 일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테이블의 분위기를 서술하던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테이블은

세계의 끝을 향해 뻗어 있었다

먼바다처럼 막막하고

고요했다.

(86쪽)

 


 이 글을 쓰는 동안 눈이 내렸다. 창밖에서 흰 알갱이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습 위로 실내의 둥근 조명이 겹쳐 보였다.

 세상에 진주가 이렇게 많았던가.

 작가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고립의 장소처럼 느껴지는 진주는 소설 진주가 세상에 나오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음은 분명하다. 에필로그에서의 말처럼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우리에게 와 닿았다. 막막하고 고요했던 테이블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당신과 나 사이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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