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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ㅣ 창비시선 173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8년 3월
평점 :
요즘 시들이 어렵다. 어떤 시들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몇 행을 읽다가 버거워 던져버리기 일쑤다. 시들이 이렇게 어려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첫사랑을 만난 기분이랄까. 아무튼 눈물이 날 것 같다. 그의 모든 시에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 있고 자연이 있고 삶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이 결코 고상하거나 어렵지 않은 어휘들로 씌어졌는데도 새벽 안개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신다.
어린시절, 나는 호롱불 밑에서 공부도 하고 뜨개질도 하면서 자랐고 우리집은 초가였다.
'아름다운 집, 그 집'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집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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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통만한 흙덩어리를 만들어
지붕 위로 휙휙 던졌다.
흙덩이들이 지붕 가득 날아올라
점점 하늘을 막았다.
흙을 밟아 이기는 흙 속의 굳센 발,
어기영어기영 휙휙 흙덩이를 던지며
가뿐 가뿐 받던 아름다운 손,
웃고 떠들며 쉬지 않던 입,
공만한 흙덩이 하나가
마지막 하늘을 막았다.
나는 큰방 자리에 서서
잠깐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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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초가지붕은 곧 새마을 운동의 바람으로 죽은 회색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어린시절 지붕을 이던 아버지를 본다. 눈과 비에 수없이 절고 햇빛에 바래 회색이 된 헌 짚을 걷어내고 타작을 끝낸 노란 볏짚으로 지붕을 덮던 두텁고 거친 아버지의 손.
꼬이고 꼬인 언어의 장난이 아니라 그의 시는 한결같이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늘 그리던 나의 고향이 들어있다.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삶에 찌든 내가 쉽게 달려갈 수 없는 고향, 나의 고향, 그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 - 소막, 흰 입김을 훅훅 뿜는 황소, 노란 산국,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풀씨......
'애인'은 설레임과 떨림이 있는 시다. 아련한 향수와 첫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에게도 그런 애인이 있었다. 고백한 적이 없는 짝사랑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자전거 바퀴 속의 은빛 살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올 때쯤이면 나는 쓸데없이 방천둑을 거닐었다. 눈이 부시게 푸른 교복을 입고 검은 교모를 쓴 그가 가까이 다가올때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마치 그곳에 볼일이 있었던 것처럼, 아주 우연인 것처럼, 놀라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도 수줍게 웃으며 차르륵 차르륵 은빛 바퀴를 구르며 지나갔다. 그 한 순간을 위해 나는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았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단 한 마디도 못해 본 것이 후회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 용기가 생긴 것인가. 세월이 흘러 떨림의 감정이 무디어진 것인가. 나에게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풋풋한 젊은 연인으로 살아있는 그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한편, 새벽 이슬처럼 깨끗한 사랑의 감정을 고이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또 무엇인지.......
시집의 첫머리에 '첫눈'의 시에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첫눈'이라는 짧은 이 한편의 시로 모든 말을 대신한다.
잃어버렸던 고향과 첫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