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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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떠도는 사진들 가운데 역사가가 하는 일을 6개의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 있는데 볼 때마다 피식 웃게 된다. 몇 가지 버젼이 있는 것도 같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친구가 생각하는 내가 하는 일, 엄마가 생각하는 내가 하는 일, 사회가 생각하는 내가 하는 일, 대학이 생각하는 내가 하는 일, 내가 생각하는 내가 하는 일, 내가 실제로 하는 일이란 말 위에 사진을 하나씩 보여주는 것이다. 친구는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한다고 생각하고, 엄마는 깔끔하게 정돈된 연구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읽는 모습을 상상하고, 사회는 사극처럼 역사적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복원한다고 생각하고, 대학은 강의를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동료 대학원생들과 사료에 대해 토론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는 어지럽게 쌓여있는 종이 뭉치들로 가득차 있는 연구실 한 쪽에 쭈그려 앉아 있다. 대학교 때 내가 좋아했던 역사학과 교수님의 연구실이 마지막 사진과 너무 비슷했던 기억이 있어서 더 공감이 되었던 것 같다.


<역사를 읽는 법>은 앞의 구분에 따르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 동료 역사학자들이 하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역사학자들이 이런 자의식을 표현하는 것은 역사학에는 역사학 자체를 성찰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역사는 역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분야이며 내가 전공한 사회학의 사회학이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이야기들이 축적되어 있다. 두 학문의 존속 기간이 10, 20배 차이가 나는 점을 생각하면 사회학을 좀더 너그럽게 평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최근 역사학의 성찰성은 대학에서 전공자 감소 등을 포함해서 크게 보아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제는 식상해져 버리기까지 한 위기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대학과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역사학자들의 멱살을 잡고 역사학이 왜 유용한 학문인지 증명해 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유연한 방법으로 철저하게 다루며 역사적 사실의 연보를 꼼꼼하게 만들고 문학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잘 완성된 서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런 생각과 역사학자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그리 멀지 않음을 보여준다. 최근 역사를 강의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서 소개되는 내용들은 오랜 전통 속에서 역사학자들이 연마한 장인정신이 빚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인들의 한땀한땀 정신은 테라 바이트의 정보를 순식간에 처리하는 현재의 환경에서 극도로 비효율적이며 따라서 유용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최근 우리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역사와 이론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고 평가된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경험론적 실증주의자 혹은 추상적 경험주의자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은 (특히 숫자화된) 측정치를 가진 것들만이 의미 있는 과학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관찰을 통해 참과 거짓을 판명할 수 있는 진술 만이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진술이라는 논리 실증주의를 떠 올리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경제는 결국 화폐를 통해 교환이 이뤄진 결과를 보여주는 측정치이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과 경제를 연관시키는 일이나 동아시아의 경세제민의 도를 논하는 철학의 분야는 잘해야 그런 측정치를 꾸미는 소품으로 존재하며, 측정치를 추상화한 것이 개념이고 개념들 사이의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연관 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이론(물론 증명하지 않고 공리 혹은 정리로 취급하는 진술도 있다)이 된다. 역사학에서 중시하는 시간성이니 역사적 맥락이니 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보편적 법칙을 찾고자 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자유주의는 경제 외적인 간섭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이며 비경제적 간섭은 자연의 경제질서를 왜곡할 뿐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는 근본주의자, 사회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자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자연의 법칙 질서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경제의 법칙 질서를 규명하는 일에 역사학의 시간성에 대한 성찰은 성가신 것이다.


<역사를 읽는 법>에서 책쓴 이가 제시하는 역사의 매력은 신자유주의의 학문적 태도를 정면에서 거스르는 데서 나온다. 책을 시작하자마자 책쓴 이는 역사학에서 시간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려준다. 시간성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 때문에 인간이 하는 일에 끼치는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일정한 시간을 살면서 살아간 시간에 맞는다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죽는다. 경제학자들이 100만 원의 효용은 누가에게나 같다고 주장한다면 역사학자에게 5살에 100만 원을 버는 것과 50살에 100만 원을 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비슷하게 내가 50대에 쓴 글을 평가하려는 역사학자는 20대에 어떤 글을 썼었는지를 살펴보고 싶어 한다. 더구나 인간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는 대체로 개인의 삶보다 훨씬 더 오랜 동안 지속된다. 이런 시간의 흐름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책쓴 이가 말하는 불가역성이다. 여기서 시간의 불가역성은 단순히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쉽게 말해 한 번 일어난 일은 일어난 채로 있는다. 낙장불입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고 어떤 일이 나중에 일어났는지가 역사학에서는 중요하고 역사학자들은 꼼꼼한 연보를 만든다. 책쓴 이가 말하는 노예제는 좋은 예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노예로 살 수 없다고 하였고 그 일이 있는 이후에도 그 선언을 한 사람들도 노예를 소유하였고 대서양 노예무역이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지탄과 반대운동 역시 계속되었다. 노예제가 미국에서 폐지된 이후 노예제를 이전과 같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비슷한 예로 유럽에서 벌어진 유태인 집단 학살 이후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정치적 의제는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될 수 없게 되었다. 설사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감춰야 한다. 최근 가자지구 전쟁에서 조직적인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항의가 제기되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이 하마스의 축출이라는 제한된 정치적 목표를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학에서 쓰는 개념들도 불가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주의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근대 이전 아주 오래 전부터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엄밀하게는 현재의 민족은 아니지만 지금 민족의 기원이 되는 인간 공동체를 원()민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원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는 그 공동체가 스스로를 원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민족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은 민족주의 이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 의식이 무엇인지 있던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어려워졌다는 데 기인한다. 그것이 무엇이었던 자꾸 원민족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책쓴 이가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말하면서도 고조선, 고구려, 통일신라를 민족사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가 지배적인 생각이 된 이후로는 더 좋은 대안적 개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국제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제는 international인데 엄밀하게 따지자면 nation이 없는 상태에서 성립 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그렇지만, 국제전이라고 하는 것이 의사소통에 가장 효과적이다.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구분은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가 낳은 문화적 구성물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인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종주의가 세계를 지배했던 이후에 사는 우리들은 시대착오적이지만 관우가 흑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편하다.


나의 이런 생각에 책쓴 이가 동의할지는 알 수 없다. 역사학에서 시대착오는 항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책쓴 이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에서 변곡점이 되는 사건 전후로 시기를 구분하고 그 시기의 특징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서 그 맥락에서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역사적 맥락화라고 하며 역사화 작업은 역사학자가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긴요하다. 책쓴 이는 역사적 시기의 전체상을 파악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종류의 사료를 검토해야 한다고 한다. 특정 사료가 그 시대를 혹은 적어도 내가 알고자 하는 일을 어느정도 대표할 수 있는지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천 년 후 조선일보라고 적힌 종이꾸러미가 우연히 발견되어 그 당시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지위가 있었으며 당시 대통령의 이름은 노무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국회라는 곳에서 탄핵된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가지만 저녁마다 일반인들이 항의하러 거리에 모이고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통령을 옹호하던 무리가 승리하게 된 이유는 잘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사료 비판이 중요한 이유이다.


이렇게 문서 자료뿐만 아니라 비문서 자료까지 많은 자료를 폭넓게 검토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정보를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된다. 문서를 통해 파악한 내용을 그 일이 일어난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드는 지리적 공간감에서 나오는 느낌까지 확인하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책쓴 이의 다른 책에서 홍명희가 18세에 아버지가 되었고 36세에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부분을 읽고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뒤에서 설명할 이유로 인해 나 같은 사회학자의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읽기 힘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독서에 역사적 맥락화가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시대적 간극을 넘어 독자와 바로 소통할 수도 있다. 책쓴 이가 중고등학교 때 읽은 이광수의 글들이 명료하고 쉬웠다고 했을 때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역사학자가 된 이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한 이광수의 글은 오히려 다시 어렵게 느껴졌다. 아마도 책쓴 이는 여전히 역사적인 맥락화를 통해 이광수를 이해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책쓴 이는 이렇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세심하게 살펴본 사실을 바탕으로 기승전결이 잘 갖춰진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역사학자가 하는 일이라고 말해준다. 이런 역사가의 작업 과정의 특징 때문에 역사가가 구성해낸 서사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세부적인 사실들로 채워져 있고 <역사를 읽는 법>에서도 우리는 흥미로운 세부 사실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된다. 신윤복의 한 그림에서 남자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옆에 있는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의 끝동 색과 고름의 색을 무엇인지 등은 대개 나 같은 비전문가가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문제는 역사학자가 구성한 서사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에 있다.


사건의 발생 순서를 꼼꼼하게 보여주었다고 해서 그 사건들 사이에 반드시 필연적인 연관 관계가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자료가 많은 최근의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서사를 구성하기는 힘들다. 특히, 자료가 많지 않은 먼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도움을 받은 추측이나 상상력에 기반한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사회과학자들은 대개 그 필연성이라는 부분에 의심을 가진다.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실제 사건이 역사학자의 서사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거의 똑같은 다른 많은 사례들이 거의 같은 발생 순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사회과학자들의 의심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은 대개 한 번만 일어난다(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헤겔과 그걸 인용한 맑스는 두 번 일어난다고 보았지만). 역사학이 제기한 문제에 사회과학적인 방법으로 답변하려고 했던 역사사회학에 대해 많은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했던 비판의 요지 가운데 하나는 너무 많은 변수를 너무 적은 사례를 통해 해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과 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을 하는 사회과학자들은 대개 적은 수의 핵심 변수로 결과는 설명하는 효율적인 저작을 선호한다. 알 수 있는 모든 원인을 전부 열거한다면 모든 사례를 다 설명할 수 있지만 그건 특별히 연구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크게 보아 거의 공시적인 변수들의 연관 관계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과학적이라고 상상하는 선형 회귀 실재론이라고 불릴 만한, 연구 대상으로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에 기반하고 있다. 이에 비해 역사학자들은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펴 보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세계를 상상한다.


역사학의 연구 성과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비슷한 다른 사례들에 일반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인식을 같이 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한 번만 일어나기 때문에 항상 특수한 것이라면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은 특수한 사건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하는가? 책쓴 이가 제시하고 있는 역사학의 시간성에 대한 통찰에 따르면 역사적 서사에 나오는 다양한 원인들이 때로는 매우 다른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주기와 지속성을 가진다. 책쓴 이가 제시하는 식민지기 광주학생운동도 나주역 사건, 광주에서의 학생 시위, 전국적인 학생 시위 등의 연쇄로 이뤄지는데 통학을 위해 나주역을 이용하는 학생들의 삶의 주기와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조직을 구성하고 유지해 오는 활동은 평소에는 서로 큰 연관이 없었을 수 있지만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역사적 서사 안에서 그 관련성이 드러난다. 역사학이 단순히 추상화된 변수들의 관계가 아닌 다양한 시간성을 가진 일들이 실재로 벌어진 과정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관련성이다.


이렇게 역사적 서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과 관계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성을 가진 원인들의 하나의 서사 속에서 연결하는 안목과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쓴 이가 주장하듯이, 3.1운동 등 항일민족운동 각각의 즉각적 결과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는 현재 시점에서 서사를 구성할 때는 매우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책쓴 이가 아주 최근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조심스러운 것은 지금 관찰하고 있는 사건이 어떤 일에서 시작해서 어떤 일로 마무리되는지를 서술하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고 그 서사에 어떻게 포함될지도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서사의 성격 때문에 역사학자의 관점은 연구 대상을 지켜보는 현재 시점의 관심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시점은 항상 역사의 일부가 되고 그로 인해 역사학자는 역사학의 역사를 통해 역사학자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꾸준히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도 하지만 역사에는 잠재적으로 미래가 전제되어 있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의 출간을 기다렸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책쓴 이의 역사 연구는 나의 연구와는 달리 역사에 미래가 있었던 시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식민지기의 시작을 전후로 나타난 민족사의 발견과 그를 바탕으로 한 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도 많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은 그 과제가 아직 성취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강요된 이념적 획일성에 대해 반기를 드는 과정에서 수용된 사회주의 역시 미래의 더 좋은 세상에 대한 비젼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 세계사적 격변기에 사회주의에 실망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대안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개혁의 의지가 현저하게 약해진 냉전 자유주의였다.


냉전 자유주의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치와 파시즘 등을 스탈린의 사회주의 체제와 함께 전체주의라고 분류하고 그 전체주의는 정치(국가)를 활용하여 인간이 구상하는 더 나은 미래를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과도하게 될 때 나타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도 국가를 장악한 다수파가 특정한 사회적 삶의 방식을 국가 기구를 통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쓴 이도 언급한 조지 오웰의 <1984>는 전체주의가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의 소련이라는 저편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언제나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자유의 근본적 측면은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라기보다는 억압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소극적인 것이다. 이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런 생각과 잘 어울리는 측면이 있다. 이성과 합리성 중심의 거대담론으로부터 억압되어 왔던 다양한 창조적 지향을 해방시키면 그 잠재성을 십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렇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교실이데아>에서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고 폼생이들의 창조성을 높이 선양하는 동안 (범생이들의) 역사학의 관심을 끌었던 문화에 대한 접근은 이전 사회주의 사상사에 대한 접근에서 보였던 것보다는 조직적 노력이 약했던 것처럼 보였다. 역사학자 개인이 소재에 따라 거의 독학을 통해 연구 방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역사학계의 문화연구는 단일한 방법론과 주제를 지닌 집단적 연구 프로그램이 되는 데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문화연구에 스며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런 집단적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위험해 보였을 수도 있다. 책쓴 이가 언급하듯이 현재 역사학의 연구 목표가 무엇인지 잘 정립되어 있는 것 같지 않는 상황이나 다양한 시간성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하는 이 책의 통찰은 한국사는 아직까지 민족사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과 묘한 긴장 관계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앞서 역사학적 개념의 불가역성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 연구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비판의식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민족국가라는 유럽인들에서 기원한 생각을 어떻게 역사 서술에서 정리해 나가야 할지는 여전한 과제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역사를 읽는 법>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책쓴 이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수준의 도덕적 지향이다. 특히,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나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소개에서 역사화를 통해 특수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이 좋을 삶인가와 같은 인류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보편적 질문에 대한 책쓴 이의 고민의 결과이다. 책쓴 이가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역사적 시간 건너에 있는 일반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보편적 수준의 도덕적 지향과 관련해서는, 학문적 엄밀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학자들의 생각이 점차 바뀌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진보적 학자들은 자신들이 방기했던 도덕과 윤리의 영역을 기독교 근본주의 등이 장악하면서 정치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해롭게 보이는 결과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책쓴 이가 언급한 다음 저작에서도 진지하고 성실한 역사학자의 가르침을 기대해 본다.


책쓴 이는 역사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단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해설서를 통해 잘 요약된 역사를 읽는 것보다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책의 원본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역사학이 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역사를 읽는 법>의 대체물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에는 이 글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많은 주제의 자세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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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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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해 고민할 부분을 잘 제안하고 있어 줄겁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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