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H.M. - 기억을 절제당한 한 남자와 뇌과학계의 영토전쟁
루크 디트리치 지음, 김한영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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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자 H·M이 남기고 간 마지막 내러티브>

-『환자 H·M』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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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내가 가장 공감하는 것은 매킨타이어가 이야기 한, “인간은 스토리텔링을 하는 존재다.”라는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과거의 사실들을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분명 이야기 속에 살고, 그 이야기를 기록해나간다. 그런데 우리가 만드는 인생이란 이야기책에는 많은 오탈자와 함께 덩그라니 빈 페이지로 남아있는 공백들이 수두룩하다. 키워드나 단편적인 지식으로는 아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알게 된 맥락 또는 그 지식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는 경우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많은 지식이나 경험은 이야기-맥락과 단절된 단순한 사실들, 즉 ‘의미기억’으로 축약되곤 한다. 의미기억은 우리 머릿속 백과사전으로 비유할 수 있다. 반면,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생생한 경험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자서전적인 기억은 ‘일화기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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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것은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우리 정신 속에 널려있는 단절된 사실들을 끌어 모아, 그들의 맥락이나 기원을 서로 연결 지어 생명력이 넘치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곧 주체성을 형성하고 ‘나’라는 존재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삶이란 응축된 기억-스토리(Storage)이며, 삶의 의미란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가치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나의 인생’이라는 내러티브-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존재는 대상화되고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대상, 인적자원-상품이 된다. 바로 여기, 헨리 구스타브 몰래슨, 통칭 “환자H·M”으로 알려진 사람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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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어렸을 적 자전거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평생 간질발작 증세로 고통 받았다. 그의 인지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무작위로 찾아오는 발작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세월이 흐르며 발작 빈도수가 늘어나는 등 병세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점점 커지자, 그의 주치의는 효과가 없는 지겨운 약물치료가 아니라 ‘실험적’인 방법을 시도한다면 치료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Lobotomy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뇌엽절제술이 그것이다. 두개골을 열어 ‘문제를 일으키는’ 뇌의 한 부분을 떼어내는 수술이다. 그러나 수술을 시작하고 헨리의 두개골을 열었을 때, 그는 떼어내야 할 ‘망가진’표적 지역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중한 의사였다면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현재 의학계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수술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적어도 실험적인 시도를 위해, 좌반구나 우반구 중 어느 한 부분을 수술한 뒤 경과를 지켜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적 지식에 목마른 연구자였던 스코빌은 헨리의 내측측두엽 전부를 빨아냈다. 양쪽 내측측두엽에 구체적인 표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양쪽을 다 파괴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환자에게는 가장 위험성이 큰 도박인 동시에, 의사이자 연구자로서의 스코빌에게는 가장 이득이 큰 행위였다. 수술대 위에 오른 환자는 그렇게 의사의 소견에 따라 뇌과학계에서 가장 귀중한 실험체, “환자H·M”으로 만들어졌다. 그 대가로, 환자 H·M은 새로운 기억을 기록하고 만드는 능력을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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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또는 실패한 수술의 결과인 환자가 왜 뇌과학계의 보물이 된 것일까? 그것은 그의 존재가 뇌과학계에 둘도 없을 ‘가장 깨끗한 변인통제 대조군’’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까지 누적된 뇌에 관한 데이터들은 전부 ‘망가진 뇌 기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것뿐이었다. 망가진 것과 온전한 것을 대조하여 뇌의 각 부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뇌과학의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과학적 엄밀성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뇌엽절제술 환자에게서 의미 있는 데이터를 뽑아낸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 환자’의 데이터에 지나지 않았다. 변인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고, 대조군이 명확하지 않은 실험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데이터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대다수의 ‘온전한 일반인’에게도 진리라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헨리는 간질 외에는 어떠한 정신 질환도 없는 ‘일반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를 대조군으로 삼아 뇌에 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면, 과학적으로 엄밀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고 정확한 지식과 인류의 진보라는 이름아래, 핸리 몰래슨은 그의 이름과 인생을 빨려버리고, 환자 H.M으로 남은 것이다 살아 숨 쉬는 이 완벽한 실험대상은 과학자들에게 인간 기억에 대한 신경학적 기초를 탐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로제타 스톤같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수술 후 수백번의 뇌실험과 임상 테스트로 여생을 보냈다. 어느 하나 기억에 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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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비극은 우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감상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 연민의 너머,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작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매커니즘을 파헤쳐보아야 한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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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헨리는 상냥하고 온순하며 순수한 존재로 묘사된다. 유순하고 수동적이고 참을성이 많은 완벽한 실험대상. 그가 인간미 없는 애완동물처럼 여겨지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편도체가 제거된 동물들이 흔히 보이는 경향성과 마찬가지로 그가 감정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MIT 랩에서 실질적으로 보호자 역할을 했던 ‘수전 코킨’박사의 태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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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의 수전 코킨 박사는 몰래슨을 깊이 연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코킨은 몰래슨에 대해 쓴 책을 디트리치보다 먼저 내기 위해 그와 경쟁했다. 본 책의 저자는 “코킨은 몰래슨에 대한 정보를 숨기거나 윤리적 문제가 있는 실험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코킨은 책을 먼저 냈다. 코킨의 책은 국내에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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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를 관리하고 보호한 코킨의 열정에는 양면성이 있다. 분명 그는 헨리가 무분별하게 언론 및 연구자들에 노출되어 시달리는 것을 막고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가진 학계에서의 권위는 순전히 ‘중요한 인간 연구재료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에서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헨리라는 복덩이 자원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강한 소유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핸리를 대상으로 하는 그 어떠한 연구도 그에게서 환자 H·M에 대한 ’사용권‘을 허락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가 가진 ’독점권‘이 인정되어 헨리의 생전 모든 기록물, 헨리를 대상으로 한 모든 실험 자료가 그의 소유였으며, 심지어는 핸리의 사후 그의 ’뇌 조직‘과 헨리의 모든 뇌 절편을 데이터화 하여 뉴런 지도를 그려낸 ’Brain-observatory 프로젝트의 데이터‘ 또한 그의 ’독점적 소유물‘이 되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헨리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자신의 논문만을 남기겠다는 선언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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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를 담당했던 연구자 수전 코킨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우리의 평범한 이웃을 “환자H·M”으로 만드는 매커니즘은 ’상대를 대상화 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내러티브의 단절‘이다.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없는 핸리 구스타브 몰래슨이라는 한 인간은 ’환자 H·M’이라는 프로젝트로 대상화되어 인격이 말살된다. 수전 코킨은 핸리 몰래슨을 철저히 대상화하였고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 수전 코킨은 헨리의 모든 기록물, 그의 건강, 그의 경제력을 보호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적이거나 공동체주의적인 것의 소산이 아닌, “냉장고에 음식을 안전하고 오래 보관”하려는 의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헨리 구스타브 몰래슨이 수술대 위에서 물리적으로 “환자 H·M”이 된 것, 그리고 평생 “환자 H·M”으로 소유되고 끝내는 죽음조차도 해방이 될 수 없었던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그를 철저히 대상화하고 타자화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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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노예제도가 성행했던 시대에도, 노예들에게 사랑을 할 자유는 있었다. 심지어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해방을 쟁취하는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고도로 문명화 된 (혹은 세련된 지배의)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노예들은 일말의 사랑, 자유의 가능성도 말살된 존재들이다. 헨리에게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느냐, 그 때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연구자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모르겠어요, 생각이 안 나요”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독백은 밑도 끝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버린, 고독하고 처절한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시작한다. 내가 어떤 기쁨, 어떤 슬픔을 겪었는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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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주, 한 해, 그 모든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쌓이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꼬이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헨리는 현재를 붙잡아두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고치지 못한다. 그는 과학과 문명의 이름아래 철저히 ‘노예’로 살았으며, 영원히 해방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의학계, 뇌과학계의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의지로 영웅적 헌신을 하려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대상’으로 살았고,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을 타자화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를 잃었고 주체성을 잃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지금까지 일궈왔던 이야기까지 모두 빼앗긴 ‘절대적 타자’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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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H·M」은 끝내 자신의 내러티브를 남기지 못한 헨리에 대한 기록이자, 그를 H·M으로 만들었던 스코빌 박사, 그의 손자가 써내려간 반성과 고발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의학계가 은폐해 버렸던 인간 ‘헨리 몰래슨’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헨리를 대신하여 그 이야기들을 짜내어준다. 염려와는 달리 그의 이야기를 어림짐작하여 꾸며내는 일은 없었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헨리(타자)와 자신 사이의 공백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다리를 놓아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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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채택한 방식처럼 우리가 그를 추모하는 방법은 그를 영웅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내러티브를 우리의 이야기로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 2의 H·M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선, 단순히 그의 이야기만을 특수한 사례로 받아들여 금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저마다의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내러티브를 존중하고, 함께 나누는 ‘건강한 공론장’을 만드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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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종말 - 불확실성의 시대, 일의 미래를 준비하라
테일러 피어슨 지음, 방영호 옮김 / 부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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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종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불안이 추가되었다. ‘지금도 살기 힘든데, 또 무슨 변화가 내 삶을 덮쳐 힘들게 할까?’ 그런 불안 심리 때문에 요즈음 서점가에서는 ‘4’자가 붙은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 한편, 교육계에서도 나름 자극을 받은 것인지 공교육 교과과정에 코딩 교육을 추가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사회가 보이는 반응이란 새로운 지식, 스펙을 더 익히자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상하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이만하면먹고 살 길이 탄탄할 것 같았던 길 위의 사람들이 취업난 속에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감하는 ‘4차 산업혁명이란 혁명이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파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혁명적 변화 앞에서 우리가 진정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을 방해한다.


  ‘커네빈 프레임워크는 인과 관계에 따른 문제 상황을 묘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류체계인데, 이 모델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를 4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복잡성 / 난해성 / 혼돈/ 단순성. 우리가 지금까지 직장에서 다루던 문제들의 대부분은 단순하거나 난해한 일에 속한다. ‘단순한 일은 매뉴얼대로만 하면 해결되는 일로서 저임금 노동자를 사용하고, ‘난해한 일은 분석과 조사를 통해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전문 지식을 통하여 일을 해결하는 고임금 고학력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 고임금을 얻기 위해서 전문적자격과 학위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탄탄한 인생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문제의 양상은 혼돈, 복잡의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문제의 해결은 매뉴얼과 전문 지식이 아닌,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비효율을 일으키는 제약요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를 앙트프레너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른다.


  즉 경제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희소자원은 이력스펙이 아니라 기업가 정신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이제 문제는 이 기업가 정신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로 바뀐다.


  첫 번째, 인간의 동물적인 방어기제, ‘손실 회피 심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 불안정을 거부하지 말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매일이 안정되고 변화 없는 일상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이면에는 항상 유동하는 변화가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다만 그 변화 정도가 축적되어 나를 덮치기 전까지는 인식을 거부하고 있을 뿐. 따라서 안정에만 매달려 변화를 거부하다가 그 누적되어 감당할 수 없는 가변성을 맞이하느니 오히려 그때그때의 작은 변화에 적응하고 피드백을 받아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새로운 전자기기 사용법을 습득하는 방법이 그러하다. 오히려 어른들이 이를 너무 딱딱하고 고지식하게 학습하려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의 추상성 때문에 많은 오해가 있지만, 여기서는 설계된 것에서 선택하는 소비적이고 허용된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지를 만드는 자기결정적인 자유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인터넷과 자유 플랫폼 시대를 이용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금은 누구나 저비용으로 자기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생산-유통하는 인터넷 음악가들,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어플리케이션 제작자들, 킥스타터를 이용하여 창작물을 만들어 파는 작은 공방들. 큰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 정해진 업무를 하고, 자신의 창조적 발상을 현실화하려면 상부로 기획안부터 통과시켜야만 했던 과거와는 엄연히 다른 모습이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저비용, 적은 시간 투자로 창작물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면, 형식적인 단계를 밟지 않아도 세상에 자기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더 좋은 것은 이러한 방식이 직업이라는 틀에서 하는 일보다 더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그 일에 내 인생을 올인 하지 않고 취미나 부업 정도로 시작해도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노동은 하기 싫은 일도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사람은 그 일에 몰입할 수 있게 되며, 마주하는 위험과 문제들을 즐기고, 관련 지식을 능동적으로 익히기까지 한다.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뮤지션이 내놓은 음악을 최고급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보다 선호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 뮤지션이 음악 만드는 것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노동이 기계에 비해 비효율적이었던 이유도 그 일들이 대부분 단순 알고리즘의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게 개인이 어떻게 적응하면 좋을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개인 못지않게 사회시스템도 발 맞춰 변화해야한다. 아니 오히려 사회시스템의 발빠르고 올바른 변화가 개개인의 변화를 서포트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개개인의 자유로운 창조 작업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복지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 부자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준다는 단순 인과적 사고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공동구매개념으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창조적인 작업도 생리적인 기반이 만족되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음악 하는 것이 좋다고 해도, 먹고 살기가 요원하면 섣불리 음악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작은 창조자들에게 사회 시스템이 가치 투자하는 형식으로서의 복지가 필요하다.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워랜 버핏이 투자하여 엄청난 수익을 얻는 바로 그 방법이다. 두 번째, 교육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직도 공교육 시스템은 과거의 단순/난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적자원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별 교사들과 교육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문제해결력과 창조적 사고를 강조하도록 어느 정도 개선은 되었으나, 국가가 교육과정을 만들고 이에 따라 교육하기를 강요하는 현 시스템 상에서 아이들이 앙트프레너 정신을 임계점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는 요원하다. 가장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공간이어야 할 교육의 장이 가장 강력한 관료제에 묶여있기에, 교사들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공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관료제는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학교는 산업혁명기의 죽은 지식과 사고를 키워내는 공간이다. ‘앙트프레너로 가득한 미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 통제의 관료제적 학교를 탈피하여,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몰입하는 교사를 양성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교육할 수 있도록 교육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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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이종필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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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 박사님의 상대성 이론 강의에서 살짝 언급되었던 이 프로젝트가 이렇게 책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와 주다니 너무 가슴이 벅찹니다. 상대성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 정도만 간단히 이야기해 주셨을때만 해도 마음이 두둥실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는데, 그 아름다운 수식에 다가갈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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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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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선불교의 문답에 대하여 다가갈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시도가 있었는가? 그런 점에서 이 저작은 침체되어 있던 선문답에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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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1인 신청합니다! 강신주 선생님의 길을 따라서 철학을 걸어왔는데, 감정수업을 거쳐서 이젠 제 길을 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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