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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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천사들의 문법_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 리, 까치글방, 2026, 초판 1쇄, 336쪽)

 

#천사들의문법 #에드워드_윌슨_리 #까치 #피코 #르네상스 #언어 #숭고함

 

이른 아침,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출근한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내 주위를 감싸는 배경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천사의 언어’로 들린다. 그들의 말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내가 상상하는 세계 너머의 공간으로 나를 데려다줄 것만 같다. 약간 과장이 섞인 생각이지만,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생각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물론 나는 그와 같은 천재는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이다.”(290쪽)

 

이 책은 짧지만 눈부신 삶을 살았던 피코의 생애를 훌륭하게 복원하는 역사서이자 이야기다. 저자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마치 전래 동화 속 이야기보따리를 든 도깨비 같다. ‘뚝딱’하는 소리에 수백 수천의 이야기가 쏟아져나올 것만 같다. 저자는 로마 대논쟁을 촉발한 피코의 󰡔900 논제󰡕에서 출발해 피코가 피렌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이 책의 씨줄로 삼았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와 베네치아, 프랑스 샤를 9세의 파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과 오스만 제국, 인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공간’을 날줄로 엮었다. 저자는 이 씨줄과 날줄을 교차시켜 수많은 이야기를 분수대처럼 뿜어낸다. 한 꼭지, 한 꼭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저자가 피코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이토록 광대한 이야기를 쓸어담은 까닭은 무엇일까.

 

 

-보편이냐 개인이냐-

#보편 #개인 #지식인 #역사 #복원

 

전작 󰡔물의 시대󰡕(까치, 2024)에서는 16세기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주 무대였다. 당시 리스본에는 대항해 시대로 촉발된 전 세계의 지식이 물(뱃길)을 통해 포르투갈로 흘러들고 있었다. 두 주인공인 ‘다미앙 드 고이스’와 ‘루이스 드 카몽이스’는 그 거대한 흐름을 보며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다. 다미앙은 전 세계 문명의 다양성과 그로부터 발견되는 보편성을, 카몽이스는 배제와 왜곡, 삭제를 통한 편협한 민족주의를 생각해낸다. 저자는 이 모든 역사적 상황과 두 인물의 생애를 다미앙의 불탄 시신과 그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문서 조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복원해 나간다.

 

물의 시대 서평 링크

 

󰡔천사들의 문법󰡕(2026)도 비슷하다. 장소는 이탈리아 로마로, 인물은 피코로 바뀌었을 뿐이다. 15세기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발달로 인해 아랍, 아프리카 문명권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지식의 집합처였다.(포르투갈과 유사하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의 기록들이 아랍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주인공 피코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문명을 빠르게 흡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속한 기독교 세계의 재해석을 시도한다. 다양한 문명 간 비교와 대조는 이런 사고실험의 중요한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다미앙처럼 다양한 문명으로부터 ‘보편성’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숭고함’이었다.

 

저자는 이 ‘숭고함’으로부터, 또는 피코의 ‘900 논제’로부터 당시 상황을, 역사를, 피코의 생애를 차근차근 복원한다. 저자는 말 그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다. 그는 다양한 사료를 분석하고, 가장 그럴듯한 당대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저자는 피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전한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해내려 시도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숭고한 힘-

#숭고함 #말 #언어 #새 #소리 #무아지경 #황홀경

 

주인공 피코는 온갖 고대 문헌을 섭렵하며 다양한 지식을 학습한다. 나는 그의 천재성과 함께 그의 열정이 참 부러웠다. 그는 고대 문헌을 직접 읽기 위해 히브리어, 아랍어, 심지어 사라진 고대의 언어까지 학습하고자 했다. 그리고 직접 고대 문헌을 찾아 파리와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하였다. 그렇게 습득한 지식은 그가 ‘보편적 철학’을 할 수 있게 한 토대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폐쇄적인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있게 자기 주장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는 어떻게 이토록 목숨을 건 위대한 시도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위협 속에서도 멈출 수 없었을까. 나는 그가 열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매우 궁금했다. 귀족 가문 출신의 지적 유희였을까. 천사와 신의 세계에 닿기 위한 종교적 열망이었을까. 아니면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명망을 얻기 위한 욕구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피코는 ‘숭고함’에 주목한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말의 힘’이야말로 우리가 신의 세계, 상상 너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매개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 힘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시인이나 연사가 말의 힘으로 상대를 조종할 것을 염려하여 ‘대화’를 강조했다.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이 위험한 힘을 끊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트텔레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바탕으로 철학을 발달시켰다.

 

‘말의 숭고한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플라톤의 추종자들에 의해 히브리, 그리스, 인도 등 세계 곳곳의 문명에서 계속 발견되었다. 심지어 피코의 사후에도 발견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발견과 함께 이를 위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교황과 신학자들이 그러했으며, 프랑스 대혁명을 경험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말의 숭고한 힘’에 의해 강력하게 조직되는 군중을 두려워했다. 교황은 피코의 저작을 불태웠고, 계몽주의자들은 공동체를 불신하고 철저한 ‘개인’을 창조해냈다. 그것이 서구 문명의 특징으로 자리잡았고, 피코가 주장한 보편적 철학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우리가 자장가를 부르면 아이들이 말을 잘 듣게 만들기 위해서 리듬의 마법과 운율의 마술을 이용하는 셈이다.”(280쪽)

 

하지만 저자는 ‘말의 숭고한 힘’이 여전히 민속 문화로 살아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야말로 우리가 복원해야 할, 앞으로 추구해야 할 전통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말의 힘을 통해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 말한다.

 

 

-다시 보편과 개인-

#보편 #진리 #개인 #욕망

 

다시 보편으로 돌아와 보자.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보편’을 진리로 여긴다.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대통령이 SNS로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을 비판할 수 있었던 근거도, 클래식(고전)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 보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코에 버금가는 여성 천재 카산드라 페델레의 편지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옳은 말로, 매력적인 연설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을 홀려서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종교적으로 ‘죄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게 된다. 마치 히틀러의 제3제국이 독일의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 체제에서 국민의 지지를 통해 조직되었던 사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저자가 마지막에 제기한 ‘초유기체’의 개념은 히틀러의 제3제국을 닮았다. 효율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황홀경을 느낄까, 거부감을 느낄까. 솔직히 저자의 결론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내가 개인주의의 늪에 빠져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친 개인주의의 폐해를 피코가 찾아낸 ‘말의 숭고한 힘’을 이용해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저자의 주장보다, 오늘 읽었던 조지 오웰의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자신이 속한 당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지만, 자기 당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만큼은 절대 해서 안 된다. … 하고자 한다면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당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일련의 사고과정이 자신의 생각을 혹시 이단으로 이끌지 모를까 하는 걱정으로 포기해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비정통적인 사고를 감지하더라도, 개의치 말아야한다.”(“작가와 리바이어던”, 조지 오웰,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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