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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생의 이면(1992)이 이승우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 장편 데뷔작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그냥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제대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가 이승우를 좋아해야 마땅하지, 라고 생각했다. 생의 이면이 난 힘이 너무 들어간 소설 아닌가, 로 읽혔고 그래서 아마 그걸 데뷔작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저 내 나름의 논리였던 듯.
지상의 노래는 2012년작이다. 생의 이면과는 20년 차이가 난다. 다른 것보다 난 이걸 주목하고 기대했다. 충분히 힘 빼고 쓴 거장의 작품. 확실히 생의 이면보다는 잘 읽힌다, 만 이승우의 소설은 술술 읽을 소설은 아닌가 보다. 글솜씨랄까 글재주랄까, 문장마다 드러난다. 그래서 좋지만 그래서 더 흐름속에서 자꾸만 나오게 된다. 내용이 아니라 문장에 주목하게 될 때도 많고, 한번쯤 되새겨야 소화되는 경우도 많다. 술술술 읽으면 쏙쏙쏙 들어와서 줄줄줄 따라갈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기독교적 구원의 문제를 시대의 고민과 연결'. '지상과 천상 사이의 갈등과 화해가 현실에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잘 형상화'. '인간 실존의 문제와 성‚속의 이원성의 극복, 초월자와 인간의 영원한 괴리 등 다소 무겁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인물의 내면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유려한 문체를 통해 그 관념성을 극복'. 한국현대문학 대사전에 이승우를 소개하고 있는 문구들이다. 소설로는 생의 이면과 지상의 노래 두 권밖에 못 읽었지만, 인용한 문구들은 그의 작품 저변에 전체적으로 공통되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두 소설에는 딱 그랬다.
지상의 노래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한다. 사촌 누나 연희와 박 중위의 사이 밖에서 크게 떠도는 후의 이야기와, 아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묘사된 한정효의 유배 또는 구금이 그것이다. 이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지점은 벽골 천산의 수도원이다. 쥐도새도 모르게 아무 이야기가 아무에게도 퍼질 수 없느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펼쳐질 수 없는 공간적 제약을 뚫고 펼쳐져 누구에겐가 알려지게 되는 이야기이다.
가족이나 사랑이라는 작고도 큰 이야기가 한 줄기를 이루고, 정치와 역사라는 크고도 작은 이야기가 또 한 줄기를 이루고, 그 두 이야기가 어우러져 교차하며 또 이야기를 만드는 구조다. 언뜻 복잡다단한 이 구조는 소설 속에 그렇게 복잡하게 얽어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건 자연스럽게 또 어느 정도 쉽게 읽힌다. 사랑, 욕망, 사건, 그리고 사건의 영향, 그 영향이 만드는 속절없는 운명,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 초월해야 하는 것들, 그래야 닿을 수 있는 길들, 그리고 지상의 노래들, 천상이 있기에 가능한 지상의 노래가 소설 속에 잘 담겨 있다.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되고,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종교적인 주제도 깊이 다뤄지고 있지만, 소설은 그렇게 종교적으로 읽히진 않는다. 종교는 일종의 배경으로 역할한다. 천상의 삶이 실제한다 하더라도 현실에 그 삶이 펼쳐질 수는 없듯이, 천상은 지상의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천상이라는 배경으로 지상은 여러 노래를 만든다. 삶이라는 게 또한 그러하다.
지상의 노래는,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답게, 천상의 주제에 집착하지 않는다. 종교적 배경을 저변에 깔고 있지만, 인간적이고도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가장 두드러진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는 '후'라는 인물은, 성경의 암논과 압살롬을 대비한다. 이복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암논과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고, 다말은 다윗의 딸이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하고 다윗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후에 압살롬 반역의 원인을 제공한다. 후는 다말을 범한 암논에게 복수를 하는 압살롬 자리에도 있지만, 암논의 자리에도 교묘하게 위치한다.
이 교묘한 이중적 자리매김이 소설의 긴장감을 더한다. 후는 연희의 복수를 위해 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사촌 누나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둘 다 맞다고 소설은 이야기하지만, 사랑과 욕망쪽으로 추는 점점 기우는 느낌이다. 사촌이지만, 후의 아버지가 연희에게는 아버지 같은 삼촌이므로, 둘은 거의 친자매에 준하는 사이로 읽히게 되어 있다.
아버지 같은 삼촌의 묵인 또는 방조, 혹은 협력으로 연희는 박 중위에게 겁탈당한다. 후는 박 중위에게 칼을 휘두르지만, 그건 정의의 실현이기 전에 상처받은 자존심과 사랑과 욕망의 경계에 있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마음 때문인 것을 소설은 주목한다. 저마다 자기 삶을 살아가지만, 그 저마다의 삶 때문에 누군가의 삶은 엉망이 된다. 저마다의 삶에 대한 집착으로는 지상의 노래가 조화롭게 울릴 수 없다. 이 노래는 필연적으로 슬프다.
소설 속에 펼쳐진 인간군상과 삶의 모습들은 여러 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람은 어떻게 그럴 수 있고, 삶은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내 선택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닌 이유로 인해, 어떤 삶은 망가진다. 그 어떤 삶은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의 삶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의 길 위에서, 우리는 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또 어떤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것들에는 더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하는가. 초월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살아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재밌게 흥미롭게 읽었지만, 재미와 흥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묵직한 소설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작품인데, 다만 나는 글솜씨가 너무 두드러져서 글이 자꾸 읽히는 경험을 하곤 했다. 너무 유려한 문체보다는 문체는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 더 좋은 소설일 수 있다는 생각을 문득 해봤다. 검과 하나가 되어 검은 사라지는 경지? 무협지를 너무 많이 읽었나 보다. 검이 아직 눈에 보였다 말하고 있긴 하지만, 소설가 이승우는 강호에 유래를 찾기 힘든 전설의 초절정 고수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