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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세월호 사고 때 많은 이들이 국가부재를 절감했다. 작게 줄어든 정부는 아무런 문제해결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콘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럼 왜 수시로 구조현장에 온갖 정보요청을 하여 일손을 뺏었던 것일까? 상징적 콘트롤 타워마저 되지 못한다면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려야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 권위는 그러한 일을 하라고 주어졌던게 아닌가? 현대사회에서 국가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가 하면 미국 대선에서 막말을 쏟아내면서도 인기를 누리는 트럼프는 민주주의 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도 몇 해 전에 이미 경험했다. 많은 시민들은 그 식욕 왕성한 기업적 정치인이 윤리성 제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의 지갑을 불려 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던가? 선거를 통해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탄생시킨 ‘민주주의 제도’는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근대 초기 숱한 혁명가들이 그렇게 피를 뿌렸었던가?
동양과 서양, 행동가와 이론가라는 대립적 조합이 흥미를 돋운다. 그러나 노회한 혁명가 드보레는 혁명의 종말을 선언한다. 오늘날엔 이미 민주주의가 혁명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혁명은 ‘각종 독재와 전제주의 정권의 위장에 이용될 수 있다는 진단이 뒤따른다. 역사적으로도 권력 남용을 반대한 아나키스트의 봉기가 오히려 더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왔다. 나폴레옹, 스탈린, 마오쩌둥, 카이사르 또한 그러했다.
“많은 경우 개인 이성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집단 이성이 되기는커녕 곧잘 집단 비이성이 된다(26쪽).”는 자오팅양의 지적에 “집단 이성이 보장되었다면 과학이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전체에서 그렇게 많은 집단적 망상과 피비린내 나는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127쪽)”라고 드보레는 화답한다. 자오팅양의 말처럼 결국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어떻게 변하는가‘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인들은 신민에서 시민이 되었고 오늘날 다시 고객이 되었다(218쪽, 드보레)’. 드보레의 진단은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이제 소비자운동으로 바뀌고 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만큼 오늘날의 자본은 무시무시한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폭스바겐이 미국에선 즉시 보상하면서도 한국에서는 미적대는 차별화의 못된 습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정치권력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특성이 있다.
이렇게 현대에 와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민주주의 사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자오팅양은 세계화가 가져올 ‘무한시장’의 영향을 우려한다. 무한시장이 모든 이의 삶을 시장의존형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필요를 넘어서는 서비스에 젖어 기꺼이 무의식적으로 통치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오팅양은 그러한 사회에서 데모크라시에서 퍼블리크라시(publicracy)로 변형될 것이라고 보았고, 드보레는 미디어크라시(Mediocracy)로의 변화를 예측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진단이자 각자의 문화권적 특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드보레는 “공적인 인물이 되려면 사상적 정교함과 세밀함을 지워버리고 잡음을 만들어야 한다. 그날그날의 주제를 단순화된 어휘로 표현하고 반역을 가장해 쇼를 해야 한다(251쪽)”고 마지막으로 주문한다. 신문의 논단이든 칼럼이든, 인터넷 블로그이든 미디어크라시의 사회에서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정치적 발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드보레의 이러한 제언은 상실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인의 역할을 알려줌과 동시에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