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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평점 :
기혼녀들이 많이 들른다는 모 커뮤니티에 가면 ‘오늘 길에서 정말 가슴 뛰는 남자를 만났어요! 남편이 있는데 어떡하죠?' 류의 호들갑이 가끔 눈에 띈다. 커뮤니티가 없다거나 양상이 다를 뿐이지 남자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혹 저 문장을 보고 혀를 찰 미혼자들도, 실상 속내는 다르지 않다. 내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끝까지 날 지지해 줄 사람의 존재를 꿈꾸는 것. 진지하게 매달리는 꿈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하는 생각 아니겠는가? 기혼자는 이미 배우자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덜할 뿐이고 말이다.
『환상의 여인』은 줄거리 상으로는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추격전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이런 아찔하고 위험한 환상의 집결체다. 이 책에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남자가 있다.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상황,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남자가 바라는 건 뭘까? 이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왜 살인자로 몰렸으며, 범인은 누구일까? 이 질문들은 독자들이 추리 소설을 읽으며 당연히 품는 의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의문에 답하는 모든 과정에 개개인의 비밀스런 환상이 녹아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환상만 쫓다 정작 주요 이야기를 비현실적으로 꾸렸을 거란 속단은 금물이다. 환상은 정말 ‘있을 법할’수록 실감나기 마련이니까. 삭막한 도시가 이런 사건의 배경으로 훌륭하게 녹아드는 것도 그렇고, 약속이 깨지자 홧김에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공연을 보러 간다는 도입부는 어떠한가. 평생 안 하던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이렇게 ‘나도 한 번쯤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은’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숨겨 왔던 내 가슴속 정곡을 찌르는 전개도 전개지만 장르 문학 내에서도 서정적인 문체로 이름 높은 문장을 읽노라면, 윌리엄 아이리시는 ‘서스펜스의 시인’이라기보다 역시 ‘환상의 작가’라고 불리는 게 맞을 듯하다. 제목도 혹시, 주인공의 무죄를 증명할 환상의 여인이 아니라 우리의 환상을 펼쳐 보여 주는 존재로서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독자가 어느 쪽으로 기대해도 그 기대를 채워 줄 작품이다.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환상의 여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