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문장은 약간 망가진 듯한 느낌을 준다. 은유도 제멋대로고, 표현과 의미가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단어에도 층위를 매길 수 있다면 작가는 그 층위를 들쑥날쑥 과감하게 넘나드는 자유로운 망아지 같은 문장을 구사한다. 광기의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 날개에 붙은 작가 연보를 보니 큰 화재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화재가 작가의 글 쓰는 스타일에 영향을 미친 건 아닐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화재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그녀는 사람들과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이질감에 붙들려버린 게 아닐까? 왜냐하면 『별의 시간』은 문장도 문장이지만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의 선택도 독특하기 때문이다. '선택'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소설 주인공인 마카베아와 같은 자존감 낮고 가정 형편에서 비롯된 무식함을 안고 있고 잘 속고 무시당하고 자신에게 안착되지 못해 스스로가 낯설기만 하고 타협과 화해가 불가능하고 그럼에도 바보 같은 긍정과 희망을 잃지 않고 미소 짓는 이런 인물은 독자 입장에서 답답하고 심지어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많은 작가들이 다루기 꺼리는 인물이어서다. 힘든 사람을 위로하는 소설을 쓰고 싶으면서도 정작 그 힘듦의 정도를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지 말아야 할(설령 현실에 그런 극단적 힘듦 상황에 놓인 사람이 무수히 많다 하더라도) 의무에 작가들은 늘 시달린다. 소설은 깎아낸 현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의무에 시달리는 작가들 처지가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비참한 인물을 능숙하게 다뤄줄 작가가 나타나기를 내심 기다렸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같은 작가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해냈다. 스토리라인을 단순히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던 마카베아는 한 점쟁이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듣고 처음으로 우물 밖으로 나오지만 그 순간 차에 치어 죽는 이야기다. 인물이 인생에 있어 어떤 값진 교훈을 깨닫는 순간 허망한 사고로 죽는다는 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아메리칸 뷰티>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스토리라인은 비슷할지라도 표현 방식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메리칸 뷰티>와 다르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비참한 인물에 대한 서사와 다른데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글은 굉장히 고어틱하기 때문이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글 자체가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프랑켄슈타인 같은 느낌이어서다. 글 초반에 한 문단을 휘갈겨쓰고서는 그 말 그대로 불가항력에 이끌려 마카베아의 이야기 속으로 작가는 뛰어든다. 이야기를 완성하고 소설로 옮긴 게 아니라 작가가 마카베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마카베아에 대한 사랑이 너무 열렬해서 그녀와 함께 글 안팎에서 걷고 마카베아의 안팎을 넘나들며 그녀를 관찰했다가 그녀 심리에 이입했다가 하고 너무 사랑이 열렬해지면 마카베아와 한 몸으로 혼연일체 되어 마카베아의 피와 살점과 숨결로 문장을 얽는다. 만약 글이 산만하고 정돈되지 않은 듯이 느껴진다면 그건 작가가 마카베아를 너무 존중해서 완성된 이야기 속에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여느 작가들의 등장인물처럼 다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가항력이라는 모호한 동기 하나만으로 문장을 써내려가기에 소설은 너무 정돈되고 까탈스러운 글이라서 작가는 어둠 속에서 손가락으로 벽 하나하나를 더듬듯 더디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과정을 용기 있고 솔직하게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