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웨어맨
염승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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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숙 소설집.
경향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현실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근본적으로 ‘나’에 천착했는데 그러다보니까 ‘나 같은 나’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사회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작가가 한 말에 꽂혔던 거다.
표지를 들춰보니 제길, 나랑 동갑인 1982년생.
또 나를 자극하는군.
나랑 동갑인데 이렇게 출중한 재능을 가지다니,
얼마나 잘 썼나 한번 보자는 시샘을 약간 가지고 읽기 시작.

단편소설 8개가 묶인 소설집이다.
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첫 작품부터 손이 없어지는 사태가 등장한다. 헉.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는 기대로 끝까지 독파.
음 역시 뭔가 있었다. (다행히 현실적인 작품과 비현실적 작품이 반반은 되어서 그것도 만족)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할 만한 혜안이나 통찰력이 있지는 않았지만,
딱 서른만큼, 30년을 꽉꽉 채워 치열하게 살았구나하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았던 작품들.
사람들을, 세상을 마주 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짠.

'아버지 말대로라면 인생이란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는 것이니, 지금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미리 예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고 예감할 수 없으니 이 맑고 뜨거운 물이 심장을 데우는 시간까지만, 나는 내 두 손을 따끈히 맞잡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과 악수하는 오늘>에서

'근데요, 아버지 참 웃긴 게요. 짝퉁의 세계에서는 '품절'이라는 게 없어요.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즌 한정판 구두라 해도, 전 세계에서 완벽하게 품절된 브랜드의 가방이라 해도 말이죠. 얼마든지, 다시 찍고 만들어낼 수 있어요. 모두가 가짜죠. 진짜란 없어요. 가짜의 세계에, 품절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단 얘기에요. 그런데 하물며……파산이라니요. 노웨어맨이라니요. 물건도 동이 나질 않는데, 대체 그게 뭐란 말이에요, 아버지.'
-<노웨어맨>에서

'이런 생각들마저 진실로 내 생각인 것일까. 누군가 했던 말을 어디선가 듣고 엇비슷이 변조해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본래, 내 것이란 걸 갖고 있는 사람인 걸까, 아닐까. 진짜는 무엇이며, 가짜는 무엇이지? 나의 진짜와 또 나의 가짜를, 나는 어떻게 분별해낼 수 있을까.'
-<무대적인 것>에서

'누군가는 달리고, 또 누군가는 달리는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누군가는 누군가를 달리게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달리는 누군가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 결국 우리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러니 88올림픽에 설렜던 아이가 자라 88만원 세대가 되는 것이 결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 삶이란, 오로지 수긍하고 수용하며 건실한 기반을 다져나가게끔 되어 있다는 것. 쓸쓸함은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번식해 천장을 적셔나가는 곰팡이와도 같이 지우고 또 지워내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레인스틱>에서

'인생에서 다만 몇 번 쯤은 미끄러지거나 헤매거나 잃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는 그 모든 삶의 노선에서 어쩌면 단 한 번만이라도 정석대로 가고 싶지 않은 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
'지구상의 모든 오차와 오류를 인정하는 것, 그것만이 길 찾기의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 자신이 위치한 그 명확한 지점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인생 최대의 과제가 아닐까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나 외에 누가 대신 증명해낼 수 있단 말입니까?'
-<라이게이션을 장착하라>에서

'특별한 자가 있으려면 아무것도 아닌 자의 존재가 꼭 필요한 법입니다.'
-<바디펌 기기의 생활화>에서

'나는 곰곰 생각해본다. 굽고, 곱고, 휘고, 둥근 그 모든 것들은 그러니 결국, 곧아지기 위해 일생을 견뎌야 하는 불행한 존재들은 아닐까 하고.'
'세상엔 주름도 많고 많고, 곡선도 많고 많고, 따지고 보면 직선이 없는 곳이야. 흔들리는 게 눈인지 세상인지 알 게 뭐냔 말이다. 제 몸의 터럭 한 올 흔들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동물은 없어. 휘면 휘는 대로, 꼬부라지면 꼬부라지는 대로 가는 거야. 걷는 순간엔 다 일직선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이리 기울, 저리 기울, 사는 게 다 기울기울, 그렇단다. 따지고 보면 매끄러운 길만큼 걷기 힘든 곳이 또 어디 있겠니. 그러니 마찰이 생기는, 주름지고 접히는 자리마다 이리들 함께 모여 사는 것이지.'
'곧아지기 위해 너무 애쓸 것 없지 않니. 주름지고 접혀야 마찰도 생기는 법이야. 생의 즐거움도, 삶의
고단함도, 언제나 그 마찰의 지점에서 잉태된단다.'
-<곡선을 걷는 시간>에서

개인 파산, 짝퉁 옷 제작자, 취업 준비생, 중소기업 사원, 온천 운영자, 몸매 관리 프로그램, 네비게이션 회사, 시력을 잃어가는 미대생, 들과 같은 다양한 소재를 들고 왔지만 어떤 하나도 대충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작가가 치열하게 취재하고 준비했다는 데에 감탄했고, 다양한 삶에 애정을 갖고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는 게 작품 구석 구석에서 느껴졌다. 
 
끈끈한 밀도로 살고 있을, 염승숙 작가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덜 외로워졌다. 
그리고 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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