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공지영의 글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공지영의 글을 그렇게 많이 읽었던 것도 아니지만, 최근 들어 1년에도 몇 권씩 쏟아져 나오는 공지영의 대량생산이 유독 불편해 의식적으로 손을 피했다. 너무 상업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 기계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글을 생산해 낸다면 분명 새로운 것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번 신작 <도가니>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으로 지나치려 했으나,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박원순 변호사의 추천사였다.

'도가니'와 무진시는 안개로 뒤덮인 이 세계의 축소판이다. 이 완강한 씨스템은 온갖 거짓과 협잡과 폭력이라는 안개를 동원해 치부를 감추고 진실을 질식시키려 한다. 누구나 말할 수는 있다. 거짓과 싸워야 한다고, 진실을 영원히 은폐할 수는 없다고, 길을 잃어도 희망을 포기해선 안된다고. 또 누구든지 폭력과 위선 앞에 분노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온힘을 다해 무서운 폭력과 거짓이 세워놓은 안개감옥으로 뛰어들어 죽어가는 진실을 구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먼저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무진'이라는 지명.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서 읽은 작품이 거의 생각이 나지 않음에도, 딱 두 작품은 잊혀지지가 않았는데, <토지>와 <무진기행>이 그것이다. '무진'이라는 지역이 갖는 정서와 함축이 첫째로 나를 끌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실과 씨스템이라는 해묵은 주제. 해묵었음에도, 그 해묵은 주제가 요즘처럼 나의 삶에서 절박한 고민이 된 적이 없기에,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이상한 일은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정나미가 떨어지는 그만큼 인간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나를 믿고 그들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던 청각장애인 아이들의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들을 위해 헌신하던 분들을 생각하면 가끔씩 내가, 삶은 결국 너무 허무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 죄송스럽다.

작가의 말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이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직장'이라고 할만한 곳에 두 번째로 다니고 있다. 물론 일의 성격이나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내가 직장을 선택함에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한 부분은 그 직장이 추구하는 가치 혹은 철학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가치 충돌이 늘 나의 내면에 있고, 많이 괴롭다. 뭐랄까 예전에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이상적인 조직, 이상적인 단체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게 되면, 결국은 이해관계 혹은 어떤 구조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은 뭐랄까 이상과는 무언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 것들을 발생시키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들고, 내가 무력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삶은 허무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된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말처럼, 경외감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은 누구 앞에서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민망한 일이다. 내 나이가 아직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사실 삶의 밑바닥을 겪어보지 못했다는 나 스스로의 컴플렉스 탓이 더 큰 것 같다.

"여기 일하다보면 말이야,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그 상식이 말이야......"
"그게......없어."

"나 강인호야, 여기는 무진이고......지갑은 언놈들이 가져가버렸고 세상은 캄캄하고 비는 내리는데 나, 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말이야, 점점 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철학의 문제도 아니고 그냥 지저분한 성폭력 문제에 왜 이렇게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달려들어 목숨을 걸고 있느냐는 거야."
"나도 그걸 잘못 판단했어. 아주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어. 아주 간단한......그것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될 줄은 몰랐어."

소설 내용은 자애학원이라는 장애인 학교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복지예산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자가 그 예산을 타 먹을 생각으로 설립하고, 그 아들들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맡아서 펼치는 적나라한 부조리들. 그리고 사회생활에 실패한 강인호가 아내 친구의 추천으로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고, 결혼생활에 실패한 인호의 1년 선배이자 무진인권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서유진이 그 중심에서 부조리와 싸워나가는 과정이다.

첫 번째 대사는 처음 이 사건을 접하게 되는 과정에서 서유진이 읊조리는 대사, 두 번째 대사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강인호가 스스로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만취 상태로 방황하다 오토바이를 탄 괴한에게 맞고 지갑도 뺏기고 난 뒤에 서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읊조리는 대사이다. 마지막 대사는 당연히 이길거라 생각한 싸움이 점점 열세로 몰리면서 강인호와 서유진이 나누는 대화.

최근 경향신문에서 '소통'을 화두로 연재를 하고 있는데, 불통 인사로 꼽힌 진중권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내가 대학생 때 이 소설을 읽었다면 아마 소설적 재미를 위해 너무 극단적이고 작위적인 설정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의외로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 사회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멀리 안 가도 MB정권에서 벌이고 있는 여러 일들이 그렇지만, 자신의 일이 되면 의외로 비상식을 주장하는 일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비상식적인 일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을 보고 있다 보면, 내가 알았던 상식이 비상식이었나 하는 의문이 생겨나고, 진실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진정성인지 가식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된다.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속은 답답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는 그런 느낌.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른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진실이 비논리적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 이 대사가 신선했다. 그럴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확실한 것은 진실은 불편하다.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솔직히 나도 그럴 때가 많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불편해 지니까. 가난해 보지 않은 사람이 가난을 대면하면 무지하게 불편해진다. 그냥 가난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아주 일부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혹은 가난한 이들의 무지나 게으름 때문이고, 좀 더 나가면 가난은 그렇게 불편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난하지 않은 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편해진다. 

그래서 난 불편한 사실들을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싫어진다. 그들은 종종 불편을 말하는 이들의 방식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며 자신은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제기되는 불편한 문제들이 싫은 경우가 많으며, 온건한 척 하나 불편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만큼은 격렬한 증오심을 표출하곤 할 때가 많다.

"새미 엄마 잘 들어. 나 그 아이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건, 너무 아니야. 너무 아닌데, 그걸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가더라도 말하고 가려는 거야. 이건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주인공 강인호는 정말이지 정형화된 소시민인데, 마지막 행적까지도. 그래서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내 밥그릇 걱정이 되고, 힘을 가진 자의 눈치를 보게 되고, 그 속에서 내 나름의 명분을 만들어 가지만, 또 한편으론 아닌 건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들다. 내가 정말 정의롭게만 살아온 사람도 아니고, 인격이 몹시 훌륭한 사람도 아니지만, 이건 진짜 아닌데...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드물지 않게 하게 된다.  내가 처음부터 돈이라든지 다른 조건만 보고 들어왔으면 차라리 이런 고민을 덜 하게 될텐데, 나름 비슷한 가치를 갖고 있는 곳이라는 판단을 했기에 이런 내면 갈등이 더 깊어만진다. 이건 진짜 아닌데 하는 생각과 그래도 여기 좋은 곳인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 그리고 그냥 주는 돈 받아가면서 내 할 일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뒤죽박죽으로 엉킨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 우리가 그걸 하찮게 여기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힘을 잃어.

그냥 좋았던 대사.

"어떻게 내 손녀를 팔아 아비의 약값을 대겠습니까?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도 안되고요. 그렇지만 선생님, 그 사람들 말합디다. 이왕 엎어진 물, 이 기회에 애 아버지 서울 병원에나 한번 보내보고 유리 대학공부까지 시키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선생님들, 그 자리에서 분명히 안된다고 했는데도 그 사람들 다녀간 뒤로 그 소리가......자꾸 들리더라 이 말입니다, 네? 선생님들, 우리 아들하고 손주는 못 듣는 그 소리가! 이 귀에 말입니다. 자꾸 들리더라구요, 네?"

이 부분은 사건을 무마하려고 자애학원 경영진에서 돈으로 합의를 하려한다는 움직임을 알게 된 강인호와 서유진이 합의를 못하게 하려고 학생의 집에 찾아갔다가 듣게 되는 이야기. 돈의 마력은, 가난할수록, 쉽게 헤어나오기 힘들게 한다. 물론 내가 가난의 밑바닥까지 가본 적은 없으나 월80만원으로 1년 반을 사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라. 여유가 없어지고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지더라. 그 때 처음 가난이라는 것이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들이 남에게 가하는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잔인했다.

폭력은 언제나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휘두르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을 하게 되면 약자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약자가 자기가 질 것을 뻔히 알면서 강자에게 대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그만한 억울함이 있기 때문이다.

"저기요.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불쌍하고 불행한 적이 있다면 그건, 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야."

내가 바뀌지 않는 것, 내가 타협하고 싶은 마음과 갈등하는 것, 사실 사회 앞에서 개인은 너무 무력하다. 난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구조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개인이 노력하면 다 성공할 수 있다는 황홀한 메시지는 실패자들을 다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주장과 맞닿아있다.

새미 엄마, 내 비록 깃발을 휘날리는 그런 영웅은 아니나,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이 개들에게 짓밟히는 걸 그냥 바라볼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은 아니야. 무진은 내게 그걸 가르쳐주었어. 나는 당신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줄 것을 믿어. 그러니 당신도 날 믿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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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2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입니다. 그래서 가진자 가 가짖 못한자보다 힘이 센가 봅니다. 가진 것까지 합쳐서 3배나 힘이 세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