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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두 번째 운명 - 악마를 변호하게 된 한 남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
심재일 / 페스트북 / 2024년 12월
평점 :

법은 '공정한 처벌'을 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서 죄를 물을 자유를 앗아갔다. 이를 통해 복수의 연쇄로 인해 벌어질 사적 처벌들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일은 막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거짓된 증거와 증언으로 만들어진 없는 죄로 인해 처벌받는 이와, 삶에 큰 상처를 낸 가해자에게 충분하지 않은 처벌로 피해자들이 짊어지는 억울한 사건들이 생겨났다. 이 소설은, 그중 후자를 주로 다룬다.
소설이라 믿기지 않고 드라마로 느껴지는 매끄러운 전개와 몰입감이다. 특히나 등장인물들간의 연결고리들이 이어지는 모습과 슬쩍 던져주었던 떡밥을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회수할 때 마다 쾌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장점들이 더욱 잘 느껴지는 포인트는 소설의 전개 방식이다. 현재 시점에서 출발하지만 과거의 단편적인 회상들을 넘나들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깔끔하게 전달할 부분만 전해 이야기의 몰입감을 느끼는 포인트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야기는 처음 대한민국 사법 체계의 허점에서 탄생한 최악의 범죄자들이 처벌을 피해 가는 에피소드들을 보며 분노가 끓고, 그다음으론 사람들의 삶과 돈을 저울질하며 법을 이용해먹는 사법 체계 구성원들의 존재감에 좌절감이 든다. 그리고 종장에는 돈이 법을 위한 도구가 되고 법이 돈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현 상황이 어떤 요소들이 뒤섞여 지금과 같은 독성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독자들에게 전하며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는지 은연중에 전한다.
성폭행범, N번방 운영자, 가습기 살균제 기업 대표, 리벤지 포르노 범죄자 등을 주인공이 강제로 변호하게 된 상황에서 본인도 사형을 부르짖고 싶지만, 아득바득 변호하는 답답함이 읽는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이후 주인공을 포함한 피해자와 판결인 들이 실제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상현실로 똑똑히 지켜보는 모습은 끔찍함에 눈이 찌푸려지더라도 정말 현실에 구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로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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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 문화, 갑을 문화, 선후배 문화, 존비어 문화, 군대식 조직 문화, 사람 갈아넣는 기업 문화 등등 조금만 들여다 보면 우리 사회에는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도처에 만연해있어. 거기에다 끊임없이 불안을 자극하는 자본주의까지 더해지면서 대한민국은 24시간 영업 중인 거대한 콜로세움으로 재건축됐지.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불안해 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불안해 하며, 희생 당하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사람들을 더 큰 희생이 기다리는 옥타곤으로 몰아가는 그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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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은 법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 온갖 흉악범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앗아간 거대 기업들이 법의 단죄를 가뿐히 피해 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답답한 가슴에 어김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피해자들은 과거부터 미래의 삶 전체가 갈기갈기 찢겨 생의 마지막 숨을 뱉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판결에, 나아가 사법 체계에, 더 나아가 이를 아우르는 국가 시스템에 문제점을 느끼지만 이미 너무나 비대해진 사법 카르텔 앞에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만이 남는다.
KARMA라는 초월적인 민간 조직이 이러한 법의 허점을 메우고, 나아가 여느 범죄 조직 못지않은 사법 카르텔에 할퀴듯 상처를 내는 이 소설은 무력함에 익숙해진 우리의 마음 한편 속에 있는 바람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