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다. 명문대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했고, 교수이자 번역가이기도 하며, 독립문학잡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나는 돈 따위에 관심을 갖는 속물이 아니다. 나는 내 지위와 우아한 태도에 신경을 쓴다. 문학에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이 언제든 마음 편하게 상담할 수 있고, 나를 신뢰하고, 그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정도면 된다. 예를 들면 박세영이라든가, 박세영, 아니면 박세영 같은…….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는 박세영, 막 자신의 날개를 펼치려고 하는 어린 나비에게, 나는 무거운 돌을 올려뒀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이코패스다.


단편 소설과 산문을 쓰는 데 재능을 보인 아이에게, 시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았노라고 거짓말하며 독일 시집을 건넸다. 당연한 수순인 양, 여린 나비는 무거운 돌을 감당하지 못했고, 날개가 찢어져 추락했다. 이것도 버티지 못하면서 무슨 문학을 하겠다는 거니. 나는 나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행복할 뿐이다. 막 날아다니려는 아이를 짓밟는 데 성공했으니. 하나의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것을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실험이 필요할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게 전부예요, 여러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뛴다는 식인종인 ‘나’. 뒤처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뛰는 현대인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풍자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거였다. 자신을 식인종이라 부르는 이 여자를 나는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 ‘나’는 사이코패스일까? 남을 짓밟고 망가뜨리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꽁꽁 숨기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주도면밀함까지 갖췄다. 이 여자, 대체 뭐야? 


왜 너는 나한테 존재하지도 않는 죄책감들을 선사하는지, 왜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그런 죄인의 세계로 몰고 가는지. 왜 나는 자꾸만 자학하게 되는지. 어린 시절, ‘마녀’를 목격했다. ‘마녀’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줬다. 보통의 주인공이라면 그런 ‘마녀’를 알아본 뒤, 눌린 사람들을 구해주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랬더라면 독자들에게 익숙한 또 하나의 성장소설이 되었을지도. 그런데 작가는 흑화 된 주인공을 그렸다. ‘마녀’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하나씩 따라 했다. 그리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따금씩 자신의 실체를 들킨 적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나’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바라보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건 완벽 범죄에 가까웠다. 너는 스스로가 저지른 범죄의 흔적들을 나한테 선물처럼 줬어. 나는 너의 쓰레기통이 되었지. 주변에 쓰레기통들을 만들면서. 


너는 완전 제로야. 완전히 텅 빈……. 이제는 알아. 너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어. 너의 실체를……. ‘난해하다’ 이 책을 완벽하게 설명해 줄 단어였다. 난해했다. 뭐라 정의하기 참 어려웠다. 작가가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게 뭐라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나름의 교훈은, 사탕발림에 익숙한, 아직 냉정한 현실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지 않을까.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그 무엇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대로 막을 내리는 이 소설. 다 읽었는데도 뭔지 모르겠는 이 느낌만이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증명하길 바라는 걸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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