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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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을 떼어 길가에 버리며 걸었다는 동화 속의 남매처럼, 민주는 자신의 꿈의 디테일들을 하나씩 버리며 걸어왔지만, 자신의 삶이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끝으로 향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했다. 박완서 작가의 콩트를 오마주 했다는 스물아홉 명의 작가들. 그들의 글 속에서 나는 2019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언급한 이 문장 하나를 발견했고 즉시 전율을 느꼈다. 길을 걷고는 있지만 이 길이 과연 나에게 맞는 길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방황하는 청춘들을 대변하는 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가 그랬듯이 그의 콩트를 오마주한 스물아홉 명의 작가 역시 복잡한 삶과 인생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문제의식 자체는 날카로운 소재였지만 글은 묘하게 따스하고 둥글게 다가왔던 박완서 작가의 느낌 비스무리하게, 그렇게 스며들었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전기 충격 테라피가 필요 없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니까. 제목부터 아이러니한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참 많은 질문을 하도록 만들었다. 삶 자체에 대해, 인생 목적에 대해. 일단 제목부터 살펴보자면 단어 ‘멜랑콜리’와 ‘해피엔딩’은 전혀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되는 단어다. ‘멜랑콜리’는 우울감과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인 반면, ‘해피엔딩’은 말 그대로 기분 좋은 끝맺음을 나타내는 단어니까.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나와 사회와 현대인들이 취하고 있는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 자연스러운 의문을 제기하게 됐다. 도대체 왜? 뭘 위해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고 현실이 현실을 포기한 이 세계를, 이 도시를, 우리는 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라고,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박완서 작가의 글을 오마주한 작가들의 글에서 답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인생이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나름의 방식대로 각자 즐기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고.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잘못되었다고 여겼던, 말이 되지 않는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했던 제목 <멜랑콜리 해피엔딩>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인생에 있어서 ‘멜랑콜리’함과 ‘해피’한 것은 어느 하나 경험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감정들이다. 지금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비록 내가 ‘멜랑콜리’하다고 해도 결국 ‘해피엔딩’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해피엔딩’을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 또한 인생이라고 스물아홉 명의 작가들은 얘기하는 게 아닐까.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하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박완서 작가의 콩트를 오마주한 스물아홉 명 작가들의 단편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온전히 글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기 때문일까? 기분 탓일 수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읽으면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통해 잠시 만났던 박완서 작가를 또다시 만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박완서 작가가 우리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이웃들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했다면, 스물아홉 명의 작가들은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닫고 기억한다면 계속 전진할 수 있는 힘을 틀림없이 얻게 될 거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내 상황이 어떻든 간에 또다시 상영관에 들어가려 한다. 해피엔딩이든 ‘멜랑콜리’한 엔딩이든, 영화는 다시 시작할 것이고 공연의 막은 또 오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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