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미한 살인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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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 바로 옆에 놓인 종이였다. 봉투를 뒤로 돌리다가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새 옷, 새 신발을 끔찍이 싫어하고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조차 혐오하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잔느.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시간에 오는 열차를 타고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직장으로 향한다. 언제나 한결같이 동일한 삶을 추구하고 그런 삶을 사랑하는 잔나의 삶은, 하루아침에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진다. 엘리키우스, 그가 보낸 편지로 인해서.


나는 남들 같지 않습니다, 잔느. 당신처럼 말이에요. 잔잔했던 호수에 돌을 던진 정체 모를 이 사람은, 자신을 엘리키우스라고 소개하며 뜻밖에도 사랑을 고백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의 세레나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기 자신을 숨기며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잔느에게. 그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았던 자신에게. 그렇게 잔느는 엘리키우스를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편지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젯밤, 난 당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그리 오랜 시간을 같이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를 죽이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함께했습니다. 엘리키우스는 뜻밖에도 잔느에게 사랑과 살인을 함께 고백한다. 자신이 살인범이고, 편재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연쇄살인의 주인공이라고.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니었던 엘리키우스의 고백. 잔느는 경찰서에서 사무직으로 1년 남짓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엘리키우스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경찰들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나’를 ‘나’로 바라봐 준 이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속삭인 이 사람이, 살인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만약 엘리키우스가 그녀를 따라온다면 그를 따라 떠날 것이다. 그게 어디든. <유의미한 살인>은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충동적인 살인이 아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실행에 옮겨진 살인에 대해. 피해자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이 어떤 사건의 가해자, 또는 방관자였고, 가해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혼란. 그 모든 것 중심에는 잔느가 있었고, 그래서 엘리키우스는 잔느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남들 같지 않습니다, 잔느. 당신처럼 말이에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부분을 들여다볼 줄 알았고, 그녀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깊숙한 내면까지 파고들 줄 알았다. 엘리키우스는 이런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한없이 낮았던 잔느에게 있어서 이 일은 그녀의 심장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었던 잔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라봐 준 단 한 사람. 살인마를 사랑했고, 살인마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만약 상대방이 살인마가 아니었다면, 잔느는 단 1만큼의 고민도 없이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단지 아무것도 아니던 자신을 바라봐 주었기 때문에. 이것처럼 잔느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져다준 것도 없을 테니까.


<유의미한 살인>을 읽으면서, 요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Love Myself> 프로젝트가 문득 떠올랐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노래의 가사와 퍼포먼스를 통해 끊임없이 전하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라는 메시지가. 이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와닿았던 <유의미한 살인> 속의 잔느. 책을 덮으면서 부디 그녀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자존감을 가지고, 스스로 학대하는 것을 멈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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