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문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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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아니다. 내가 불행에 빠진 이유는 단순히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347). 다지마 가즈유키는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두어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이후,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동네에서는 다지마 가의 누군가가 할머니를 독살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이 커져 가정은 깨어지고, 가즈유키는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렇지만 그에게 나름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구라모치 오사무였다.


구라모치가 끊임없이 내 주위를 맴돈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가장 다루기 쉬운 상대, 그것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121). 구라모치와 함께한 이후로, 이상하게 가즈유키의 삶은 꼬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려 애쓰지만,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들. 어린 시절에 구라모치를 따라 간 오목집에서는 사기를 당해 제법 큰돈을 잃었고,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대기까지 한다. 좀 더 자란 이후에는 가즈유키의 이름 앞으로 저주의 편지가 오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그 이후로 가세는 기운다.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여학생은 가즈유키와 만난 이후 자살을 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다단계와 주식사기에 손을 댄다.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구라모치를 향한 원망과 살인의 욕구가 자리를 잡아가고 커지고 있던 찰나, 자신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구라모치라는 것을 알게 된 가즈유키. 과연 그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고 ‘살인의 문’을 열게 될까?


그때 뇌리에 떠오른 녀석이 구라모치 오사무였다. 구라모치는 당해도 싼 놈이라고 생각했다(123).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답답한 소설이었다. 주인공인 가즈유키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어, 번번이 당하는 그의 무력한 성격과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모습에 계속 한숨이 나왔다. <살인의 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구라모치를 ‘악의 화신’, 악의 축으로 보았다. 하지만 구라모치의 권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오목집에서도, 저주의 편지도, 다단계와 주식사기 모두 다 가즈유키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구라모치를 원망하고 살인 충동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에 나는 더한 충동을 겪어야만 했다. ‘그냥 책 덮어버릴까’


어떤 계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인이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경우 바로 그 계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계기가 없으면 살인자가 되는 문을 통과하지 못하죠(313). 평생 자신이 구라모치에게 농락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에서는 나도 소름이 돋았다. 초등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남을 속이는 데는 타고났고, 영악하게도 가장 다루기 쉬운 아이를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심지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 행동을 반복했다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단지 그를 동경했고 그의 삶을 질투했다는 이유만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그 누구의 편도 쉽사리 들어줄 수 없는, 어떻게 결론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 <살인의 문>.


어떻게든 작가를 이해하려 애를 쓰다 보니 내 마음대로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픽션의 세계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현실세계를 살아가다 보면 원한과 케케묵은 감정이 워낙 옛날부터 얽혀있는 바람에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건사고들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사건의 감정선을 <살인의 문>에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지만 피의자라고 알려진 구라모치의 시선에서 써졌다면 또 어떤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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