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마릴린과 두 남자 세트 - 전3권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 전쟁을 다룬 장편 소설의 제목이 '마릴린과 두 남자'라니. 흥미로웠다. 당사자가 아닌 제3의 눈, 종군기자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한국 전쟁의 진실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 종군 기자 사이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마릴린은 왜 등장해야만 했는지도 알고 싶었다. 책 표지는 왜 강렬하게 빨갛고 노랗다 마지막 권에서 파래져야 했는지도.


 책을 읽기 전, 종군 사진 기자의 라이카를 통해 현상되는 사진들은 바보같이도 객관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데올로기에 갇혀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지만 모든 사진에는 기자의 관점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1권 초반부를 읽으며 금세 깨달았다. 전쟁을 이용해 득을 취하고 언론사의 방향에 맞춰 기사를 수정하고. 기사화되지 못한 채 일부만 비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해지기도 했다. 모든 시선에는 편견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전쟁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 냉철한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전쟁의 참상을 마주했고, 다양한 이념들의 대립을 마주하면서 점점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주인공 하워드와 칼이 느끼고 생각하고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어떤 인물에 가까운지 물으며 점차 나만의 기준을 찾아가려 애를 썼던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자꾸만 내게 질문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워드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에이미에게 점차 느끼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들처럼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작가가 표현한 전쟁 안에는 삶의 수많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 원초적인 감정, 가난과 약자 속의 약자, 불평등과 차별, 여성 혐오, 폭력과 분노, 모순덩어리인 삶. 아주 굵직굵직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느라 미처 놓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삶을 좀 먹고 있다. 마치 삶이 전쟁인 것처럼.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던 적이 없었다. 단순히 역사 책에서 배우는 과거였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솔직히 피부로 와닿지는 않는 것들이었다. 이 책은 전쟁이 품은 수많은 야만적 속성을 영상보다도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워드는 여과 없이 말했다. '저 평형의 저울은 어떤 식으로든 균형을 맞출 것이다. 총알은 가려서 날아오지 않는 법이니까. 전선에서 이것보다 명확한 명제는 없다. 삶과 죽음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용한다.'라고. 총이 있으니 방아쇠를 당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사실적 묘사를 통해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고, 철썩이는 파도에서 무의미를 말하는 하워드를 통해 전쟁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했다. 다 늙어버린 하워드의 회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나는 이 아픔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의문의 실마리들을 풀어가고 있었다.


 이 소설의 본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언어 자체로는 인간의 감정을 다 드러내고 감싸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깊은 감정은 심해처럼 낮은 곳에 여전히 미발견 상태로 놓여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생에의 어떤 부분은 웅장하게 감추어진 것들을 찾아나는 데 써야만 한다.' 전경일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그 무언가를 찾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둡고 무겁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주제를 다룬 통찰력 넘치는 장편 소설이다. 이 책은 당신들은 어쩌다가 형제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되었는가라고 분명히 묻고 있다. 남북 분단과 점차 민족성이 결여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가지는 감정들은 누가 만들었고 어디에서 왔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권력을 누리는 비열한 사람들과 무기 생산을 통해 부 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챙기는 나라를 두고 우리는 얼마나 더 차갑고 이성적이어야 하는지. 고통을 쉬쉬하지 않고 온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파랗게 생각할 수 있을 때, 갈등의 노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전쟁과는 대비되는 것만 같은 유명인사 금발의 마릴린이 전쟁터 한가운데에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점차 주체성을 가지고 지식인이자 사회혁명가가 되는 것처럼, 평화를 위해 지독한 편견과 차별에 투쟁하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삶을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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