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등 - 허준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4
허준 지음, 권성우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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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패망했다. 크고 무거운 부당을 향해 폭발탄처럼 터져 나오던 반항과 투쟁 (조명희, 「낙동강」),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 수치, 그러면서도 그 속을 비집고 나오던 일말의 희망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이 한데 얽혀 가득 담겨있던 시기가 깨어졌다. 그 이후, 조선에서 흘러나온 모습들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본 적 있는가. 막연히 모두가 즐거워 들떴을 거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단순한 감상이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잔등」 은 그 깨진 시기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나’ 의 눈을 빌려 본 조선의 모습은 생각 외로 “허무”하다. 우선 ‘나’ 부터가 그러한데, 해방에 대해 이렇다 할 감흥 자체를 갖지 않는다. 고통스러웠을 법도 한 식민지 체험에 대한 것이나 기대될 법도 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것에도 매한가지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인물 설정에서부터 나는 작가 허준 본인의 해방에 대한 감상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무감각하고 왠지 얼마쯤 비켜서있는 듯한 ‘나’ 의 태도는 해방이라는 사건을 제 3자의 시선에서 보고 있는 – 더 극단적으로 보자면, 그에 별 관심이 없는 – 허준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외부의 혼란보다 차라리 제 내면의 불안과 고독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모습. 실제로 그는 「잔등」 의 서문에서 ‘새 시대의 거족적인 영광과 투쟁 속에서 자그마한 감격은 있어도 좋은 것이 아니냐고들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반드시 진심으로는 감복하지 아니한다. 민족의 생리를 문학적으로 감득하는 방도에서, 다시 말하면 문학을 두고 지금껏 알아오고 느껴오는 방도에서 반드시 나는 그들과 같은 방향에 서서 같은 조망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하니, 영 틀린 추측은 아니지 않을까.
이 무감각한 ‘나’ 를 통해 우리는 그의 눈에 비치는 당시 조선의 모습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나’의 여로 속에서 우리는 해방 직후 흥분과 슬픔, 희망과 절망, 허무와 기대가 어지럽게 섞인 혼란의 조선을 만날 수 있다. ‘나’ 가 만난 뱀장어를 잡는 소년은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보여주고, 청진 역에서 국밥을 파는 할머니는 전자와는 다른 일본인에 대한 동정과 이 절망의 사건에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더 큰 비애, 그리고 감동적인 인생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패자로서 거지처럼 살아가는 일본인들과 전쟁의 흉터가 남은 회령 정거장의 모습은 허무, 그 자체일 따름이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다시 청진을 떠나며 ‘나’ 는 인생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 기억을 향해 ‘한없이 한없이 손들을 내젓’는다. 그것은 내면의 고독과 불안을 생각하는 ‘나’에게 보내는 ‘나’ 자신의 위로이자 ‘황량한 폐허’ 와 같은 시기 속에서 유유히 명멸하는 잔등과 같은 인생에 대한 애정에 보내는 응원이 아닐까, 하고 멋대로 믿었다. 절망이 끝나고 난 뒤, 조선에는 혼란이 남고 허무가 남고 고독이 남고 불안이 남고 증오가 남았으나 남은 인생도, 그리하여 살아가야 할 인생도 아직 남았다고. 그러니 힘내서 사랑하고 또 살아가보자고. 이러한 위로가 진정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가감없이 담은 이 작품의 결론이라면, 이보다 더 힘 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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