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작품 선집 대한민국 스토리DNA 23
백석 지음 / 새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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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석.
그 이름을 떠올리면
하얀 돌로 촘촘히 쌓은 벽이 그려진다.
하얀 종이 한 장, 한 장이 마치 시인 백석이라는 흰 바람벽 같은 
그의 작품 선집 <흰 바람벽이 있어>
그 표지마저도 우윳빛 자개가 마치 쌓아 올린
흰 바람벽 같은 <흰 바람벽이 있어>
그렇게 온통 흰 바람벽에 휩싸여 보았다.

백석의 시를 하나 하나 읽고 있자니
그의 시어처럼 그의 시는
"푸른 바닷가의 하이얀 하이얀 길(남향-물닭의 소리4;95쪽)"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하이얀 하이얀 길을 따라 가며 
오감을 건드리는 그의 시어들에 하나 하나 반응하게 된다.

눈 앞에 펼쳐 보여주는 시의 정경들.
'흰 두레방석(비;22쪽)'이라 한 아카시아, '하이얗게 빛(흰 밤;26쪽)'나는 달,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지(여승;51쪽)'는 풍경,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창의문외;59쪽)'나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옛적이 들은 듯(탕약;69쪽)한 탕약,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리(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84쪽)'는 모습 등 흰 바람벽에 지나가는 모습들을 한 동안 깊게 바라본다.

냄새 역시 진동을 한다.
조부모가 계신 큰집 안간에 모인 가족친지들이 풍기는 '새옷의 내음새(여우난골족;23쪽)'와 부엌에서 끓이는 '무이징게국(여우난골족;24쪽)'의 맛있는 내음새, '개비린내(비;22쪽)',와 '김 냄새(통영; 27쪽)'나는 비내음, '머루빛 밤한울에 송이버슷의 내음새(머루밤;50쪽),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가득하니 꿀벌들이 많이 날어드는 아츰(정문촌;60쪽)' 등 흰 바람벽을 타고 흘러나오는 냄새는 때로 향긋하고 때로 구수하고 때때로 비릿하다.

두 귀 역시 가만 두지를 않는다.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정주성;20쪽),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을 뚜드리는(미명계;42쪽)' 소리,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하(추일산조;44쪽)'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통영;65쪽),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탕약;69쪽)',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85쪽)' 등 흰 바람벽에서 진동하는 소리들에 귀기울이다 보면 마음까지 기운다.

혀는 정말 그 맛이 궁금한 음식들에 입맛을 다신다.
'시큼털털한 술(고방;34쪽)'이라는 찹쌀탁주며, '도토리묵 도토리범벅', '노란 싸리잎이 한불 깔린 토방에 햇츩방석을 깔고(여우난골; 61쪽)' 먹는 호박떡,  '찌륵찌륵 우는 전북회(삼호-물닭의소리;92쪽)',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국수;122쪽)' 등 식욕을 자극하는 바닷가 음식들과 고향맛이 나는 토속적인 음식들에 회가 동한다.

피부에 와 닿는 감촉 역시 생생하다.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여승;51쪽)'던 여인의 울음, 낮 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사(황일;67쪽)'하고 '다람쥐 건넌산 보고 부르는 푸념이 간지럽다. 저기는 그늘 그늘 여기는 챙챙- 저기는 그늘 그늘 여기는 챙챙-(황일;67쪽)',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삼천포-남행시초4;73쪽)' 그래서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삼천포-남행시초4;73쪽) 등 흰 바람벽에 손을 가만히 대어 보면 전해지는 감정의 감촉에 손바닥이 떨려온다.

하나 하나 그 전부를 어떻게 다 여기에 옮길 수 있겠나 싶다.
그저 그의 시어들이 쌓여 있는 그 흰 바람벽에 가만히 기대어 본다. 
내 오감들이 그 흰 바람벽을 따라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평안북도 방언 같은 낯선 단어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자연스레 그 단어 자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단순하게 시를 따라가게 되었다.
백석 시인의 시들을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하자
백석 시인을 두고 윤동주 시인이 말한 '맑고 정한 영혼의 시인'이란 표현이
너무나 적확해 더 이상의 표현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의 흰 바람벽에 지나가는 글자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또 다시 지나가는 글자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흰 바람벽이 있어;125쪽)
백석 시인이 그렇고 그의 시가 또 그러하구나 싶다.

<흰 바람벽이 있어>에는 그의 시 외에도 
그의 번역시와 수필, 서간문도 함께 실려 있어 
그가 쓴 다른 스타일의 글들도 만나볼 수 있다. 
번역시에서는 시 자체가 갖는 강인한 힘도 있겠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백석 시인의 힘도 느껴진다.
수필과 서간문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인간 백석을 보는 것 같아
그가 더 현실감있게 그려진다.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담긴 최정희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랑과 슬픔이 절절하게 드러나 시만 보았을 때와 또 다른 감정들이 더해진다.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
마가슬(막바지에 이른 가을;113쪽)에 만난 백석의 작품들
참으로 호호한(넓고 빛나고 맑은;114쪽) 가을 한울과 
차고 시리지만 투명한 겨울 한울을
자꾸 올려다보며 내 마음을 비추게 만든다.
눈 앞에 백석의 말들로 가득한 <흰 바람벽이 있어> 너울거린다.
한동안 이 희디 흰 바람벽의 너울거림을 따라 
내 시선이, 내 손 끝이, 내 마음이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 덕분에 백석앓이를 제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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