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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속의 호랑이 (독일어 완역판) - 독일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 회고록
오토 카리우스 지음, 진중근.김진호 옮김 / 길찾기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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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으로부터 10여 년쯤 전인 2012년 말, 전설적인 티거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가 집필한 회고록 [진흙 속의 호랑이]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간됐습니다. 밀리터리 취미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는데도 티거 전차가 얼마나 전설과도 같은 병기인지, 또 오토 카리우스가 적 전차 150대를 격파한 독일군 최고의 티거 에이스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죠. 아직 뭣도 모르는 중학생이었지만 출판 소식을 듣자마자 서점에 달려가 곧바로 초판을 구매하고 몰입하여 열심히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출판 직후부터 각종 오역 논란이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했지만 아직 그런 인터넷 커뮤니티의 존재조차 몰랐던 중학생에게 [진흙 속의 호랑이]는 정말 굉장한 책이었습니다.


별책 부록 티거피벨과 함께 포장되어 서점 매대에 진열 중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처음 밀리터리 취미를 가지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티거 전차"를 사랑하는 저에게 본 책은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때문에 오역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의 안타까움도 컸고요. 현재로써는 오역 의혹을 제시하고 논란을 불러일으킨 글들이 모두 사라져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평소 밀리터리 포스팅을 하는 저도 중역본 그 자체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에 아쉬움이 계속 남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독일어 원전을 직역한 [진흙 속의 호랑이] 완역본이 10년 만에 한국에 출판된 건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역본 역자 후기에서 언급되었듯 구 버전의 번역 문제는 오역 이전에 독일어 원전과 영어 번역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 컸습니다. 애초에 독일어를 영어로 옮기며 표현상 많은 차이가 발생하였고, 이를 한국어로 중역하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식 표현과 화법이 가미된 2012년 판본보다 독어를 직접 번역한 본 완역본이 더 자연스레 읽히는 건 당연한 것이겠죠. 이렇다 보니 폐급 중대장의 이름을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여 폰 X로 계속 표기하거나 전쟁 당시의 여러 용어를 그대로 번역하는 등 완역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번역의 질이 개선된 게 보입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독어 실력으로 독어 원서를 독해할 수는 없고, 영역본 Tiger in the Mud을 구매하여 세 권을 두고 번역을 비교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이건 정말 어디까지나 막연한 희망의 영역으로 남겨놓아야겠습니다.


독일 연방군 기갑 장교로 수십 년을 복무한 예비역 대령이자 나치 독일 중전차대대 연구 권위자인 볼프강 슈나이더는 저서 Tigers in Combat 서문을 통해 본 서를 상당히 오랫동안 중전차대대 전사를 다룬 유일했던 출판 서적이자 "고전"이라 고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Tigers in Combat 1권 제502 중전차대대 약사 파트에는 카리우스란 이름이 수십 차례나 언급되며, 그가 복무하며 티거 전차장으로 활동했던 기간은 같은 부대 약사 내에서도 유독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한 전투 기록이 남겨져 있는 편입니다. 슈나이더가 서적 집필에 2차사료로 카리우스의 회고록을 인용하기도 했으니 [진흙 속의 호랑이]는 상세하게 전투를 기록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할 수 있겠죠. 또 동시에 특정 부대사를 다룬 서적도 아닌데 한 인물이 이렇게까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오토 카리우스란 인물이 제502 중전차대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핵심 인물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많고 많은 회고록 속에서 유독 본 서가 큰 인기를 끈 데는, 물론 저자가 "티거 에이스" 슈퍼스타라는 점도 있겠지만, 전장의 생생함을 드러내면서 전차병으로서 겪은 경험담을 자세히 기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몰입감 있는 간접 체험과 함께 (한국 한정으로는) 군필자 분들의 큰 공감을 산 데 있을 겁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는 어떤 전투가 벌어져서 어떻게 싸웠는지에 그치지 않고 전장 역시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사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한심한 중대장 폰 X 때문에 발생한 여러 일화들, 매 아침마다 커피를 배달하러 포화 속을 누비던 급양병처럼 전장에서 별의별 먹고 자는 이야기, 57톤짜리 육중한 중전차를 정비하고 관리하느라 뼈빠지게 고생하는 이야기, 각종 기상천외한 실수나 사고 등등 저자의 회고는 딱딱한 전쟁기계보단 시쳇말로 군필자의 썰풀이에 가까울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동시에 유능한 전술 지휘관이었던 카리우스는 독일 국방군으로 복무하며 얻었던 교훈을 후신 독일 연방군 장병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을 관철시키거나 독자적인 판단을 내려 임무를 성공으로 이끄는 등 저자의 여러 일화는 임무형 지휘체계의 중요성을 설파합니다. 저자의 군 생활은 이러한 교훈과 결합하여 현대에까지 각국 군대에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깁니다. 전투 상황에 돌입했을 때 우리 군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부터 상급자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하급자는 어떠한 역량을 갖춰야 하는가 등 [진흙 속의 호랑이]는 적잖은 질문을 던지고 또 그 질문에 대한 답안을 예제처럼 보여줍니다. 본 서가 보여주는 답안은 대체로 우수한 편이지만 언제나 맞았던 것은 아니며 그래서 우리는 이를 기반으로 더 나은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할 겁니다.


물론 카리우스의 회고는 국방군 무오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토 카리우스는 서문에서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독일 국방군을 폄하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행해지고 있다 말하며, 이에 맞서 자신과 전우들-더 나아가 참전 장병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진흙 속의 호랑이] 초판 출판이 1960년으로 서독에서 과거사 문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할 때임을 감안하면 저자가 이런 시류를 불편하게 여겼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중전차대대 부대원으로 전쟁범죄에 연루될 일 없이 전우들과 피땀 흘려가며 목숨을 바쳐가며 전투를 치렀다면 국방군 전체에 대한 재평가가 일개 개인으로서 억울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팽배했던 인종적 편견 없이 소련군을 높게 평가하는 서술을 한다 한들 저자가 독일 국방군이 범죄 집단임을 부정하는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죠. 어쩌면 [진흙 속의 호랑이]는 결국 당시 참전 장병들 그리고 나치 독일 치하 소시민들의 평균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여러 사료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진흙 속의 호랑이]는 10년 전 영어 중역본을 통해서도 이미 많은 분들이 서평을 남긴 바가 있습니다. 많은 내용이 기존의 서평들과 중복되고 또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되다 보니 제가 더 이상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과거 장갑묘 님께서 남겼던 평가처럼, [진흙 속의 호랑이]는 우리에게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하나의 훌륭한 프리즘이 되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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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 역사를 뒤집은 게임 체인저
폴 록하트 지음, 이수영 옮김 / 레드리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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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오타쿠, 속칭 밀덕들은 대개 크고 강한 화력을 가진 병기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력한 화력을 뽐내는 병기는 저희 같은 밀리터리 취미인들을 매료시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일종의 로망 같은 것이겠죠. 다만 그렇게 화력에 열광하는 취미인들 중 이 화력이란 것이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형성되어 발전해온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적어도 제 자신은 그랬죠. 실제 역사의 흐름에 있어 화력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쳤습니다. [화력: 역사를 뒤집은 게임 체인저]의 저자 폴 록하트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전쟁이 오늘날의 국가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전쟁을 만든 것은 화기였다."

본서 564p


'무기가 전쟁은 물론 그 너머 우리의 삶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쳤을까?'라는 질문은 밀리터리 취미인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초장부터 이 책이 "전쟁 무기"를 다룸을 못 박아 둡니다. 전쟁 무기를 다룬다 선언한 만큼 폴 록하트는 병기라는 주제에 대해 깊은 전문성을 확보하고 놀라울 정도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군사 마니아들이 쓴 전문 무기 서적과는 선을 긋습니다.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치중하여 광범위한 역사적 배경과 이해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록하트는 군사력이란 요소를 정치, 경제, 사회와 연결 지으며 화기의 발전이 직간접적으로 시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켰는지 납득시키려 노력합니다. 즉 [화력: 역사를 뒤집은 게임 체인저]는 좁디좁은 전문성만을 가진 기존의 서적들과 달리 전쟁 무기, 전쟁 기술에 대한 연구를 역사의 여러 광범위한 축과 연결시킵니다. 누구나 흥미로워할 주제였지만 쉽사리 정리하여 결론 내리긴 어려웠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엮어낸 통찰력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서는 1300년부터 1945년까지 600년가량의 화기 발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긴 시간과 그 사이 사용된 수많은 병기를 다루는 개론서이지만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볼륨 덕에 개론서임에도 놀라운 정도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정한 병기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했는지, 그 작동 방식은 어땠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 아주 충실하게 전쟁 무기라는 주체를 다룹니다.


화약 혁명은 전쟁의 법칙을 다시 썼고, 기존 지상전 방식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 전쟁 수행의 규모가 상상할 수 없던 수준으로 변화하는 첫 번째 단계였을 뿐이다.

본서 50p


이런 상세한 서술이 두드러지는 건 특히 책의 초반 1부와 2부입니다. 화약 혁명으로 중세 봉건 왕국이 관료주의 국가로 전환되는 1300년부터 1800년까지 500년이란 긴 시간을 다룬 1부, 민족주의와 산업혁명이란 혁명을 겪으며 급속도로 전쟁 기술이 발전하는 1800년부터 1870년까지 70년을 다룬 2부는 상대적으로 밀리터리 취미인들의 관심이 덜한 시대이지만 저자는 그렇기에 오히려 이 시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듯합니다. 삽화가 동반되어 개별 병기의 작동 방식마저 놓치지 않은 이 단락은 후반부 20세기 화기 발전사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디테일을 보입니다.


물론 이 책이 (앞서 언급했듯) 그저 화기가 어떻게 발전해가는지 기술적인 디테일만을 훌륭히 다룬 건 아닙니다. 저자는 산업혁명 시기까지조차 화력 그 자체는 역사를 뒤흔든 주 요소가 아니었다 이야기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와 군사력이 복잡하게 얽히며 국가는 발전해 왔고 그 요소 중 하나로 전쟁 무기의 기능적 향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군사 서적에서는 이런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저자는 향상되는 화력을 완벽히 제어하고 운용하고자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국가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제시합니다. 적절하게 시대별로 부를 구분한 덕에 기술적으로 발전한 화기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시대를 따라 살펴보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다만 아무래도 폭발적인 화력의 발전이 있었던 20세기 화기들에 대한 설명은 앞선 부분보다 조금 개론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이는 화기 그 자체보다는 이러한 기술적 혁명을 어떻게 사용할지, 일종의 군사적 패러다임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감안해야겠죠. 저자 역시 무기 그 자체보다 부대와 무기를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사용 방식의 차이가 두드러짐을 지적했고요.


화력 혁명의 영향은 전쟁터, 공장, 공급망을 훨씬 뛰어넘었다. ... 무기 개발과 외교, 국정, 대전략, 지정학, 경제, 민족주의 세력 같은 거시적인 문제들 간의 연관성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으며 복잡했다. 이 모든 것은 전술 및 작전과 마찬가지로 쌍방향 관계를 맺고 있었다.

본서 246p


화력을 투사하는 국가 단위를 소멸시킬 수 있는 원자력, 핵전쟁의 시대가 왔음에도 화기는 여전히 중요한 전쟁 수행의 요소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이제 화력 그 자체의 위력보단 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적절히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냐가 중요해졌습니다. [화력: 역사를 뒤집은 게임 체인저]은 군사사 연구가들이 어째서 화기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합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화력에 적응하고 그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혁해야만이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음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화력 그 자체가 역사를 뒤집은 게임 체인저라 불리기엔 이견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의 변혁에 기여한 요소이지 주체는 아닌지라... 영어 부제인 'How Weapons Shaped Warfare' 정도가 덜도 말고 적절했는데 한글 번역을 하며 의미를 일부러 더 부여한 느낌이 없잖아 있네요. 어디까지나 개인적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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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 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 건들건들 컬렉션
디디에 알칸트.로랑 프레데릭-볼레 지음, 드니 로디에 그림, 곽지원 옮김 / 레드리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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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개막하고 벨 에포크 시대의 낭만에 젖어있던 서구 문명은 총력전의 시대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근현대 100여 년간 발전시킨 과학, 산업, 문화, 정치의 종착지는 모든 전쟁을 끝내고자 시작한, 그러나 더욱 거대한 후속작을 자랑하게 된 양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는듯했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양차 세계대전 시대 막바지에 탄생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병기가 등장함에 따라 반세기를 지배한 총력전이란 전쟁의 형태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원자폭탄 그리고 핵전쟁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이 위대한 병기가 탄생하게 된 과정은 과학적 호기심과 열렬한 애국심에 기반한 흥미롭고 경이로운, 그리고 한편으론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의 냉혹하거나 참혹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잔혹하면서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야기들이죠. 프랑스 출신 만화가 디디에 알칸트(Didier Alcante, 로랑 프레데릭-볼레Laurent-Frédéric Bollée, 드니 로디에Denis Rodier는 원자폭탄 개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래픽 노블로 엮어냈습니다. 원자폭탄을 둘러싼 장대한 대서사를 다룬 역작 [원자폭탄 - 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La bombe)]입니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이 흥미로운 생명체들은 언젠가 내 운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들끓는, 이 요동치는 에너지를 해방시킬 자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 이제 세상에서 위대한 과학자들이 나에게, 나의 성질에 관심을 가진다. 머지않아 나의 때가 올 것이다.

내 전기의 새로운 장을 쓸 시간이 왔다.

[원자폭탄]은 제목 그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 원자폭탄의 탄생을 다룬 그래픽 노블입니다. 인류 지성의 상징 과학자 집단이 처음 무기를 제작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러한 건의에는 세계를 광기로 몰아넣은 끔찍한 전쟁을 종결시키고 더 나아가 핵 균형에 의한 평화와 국제정부 수립이란 합리적 목표가 깔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완성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과학자들이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두려운 것이었죠. 가공할 만한 위력의 에너지를 인지하고 폭탄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때부터 맨해튼 프로젝트가 수립되고 원자폭탄 개발에 박차가 가해지는 과정은 물론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완성된 핵무기가 히로시마에 떨어지는 시점까지, 본 책은 각종 사건 그리고 사람들이 얽히고설킨 원자폭탄의 이야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촘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 상당히 입체적이란 평가를 내리고 싶은데, 미국이 폭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해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에 더해 원자폭탄을 두고 벌어진 세계 각국의 사건들 그리고 잘 조망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시도와 노르웨이 중수 공장 습격, 인디애나폴리스함 침몰 사건과 같은 내용들이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고 스파이 분량에 짧게나마 얹어간 소련의 핵 개발 시도와 포츠담 회담에서의 팽팽한 외교적 긴장 관계는 곧 다가올 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핵무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그래픽 노블-흔히 말하는 만화책임에도 총체적인 내용 면에서 어떤 다른 역사책들에 밀리지 않는 방대한 정보량을 갖췄음이 대단합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나의 열렬한 신봉자일 것이다.

마치 나 덕분에 미군 백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믿으면서 말이다.


비밀리에 플루토늄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총 18명이었다.

이 18명 중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당연히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그는 특이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미국에 폭탄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했지만... 나중에는 폭탄 사용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자신의 피조물이 가진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죽이려 한 것이다!


나는 은행 앞에 앉아 있던 이 남성을 기억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바로 그 시각에 나도 해방되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다시 먼지가 되어버린 먼지 한 톨에 불과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핵무기 개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여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며 책의 흐름에 숨결을 더욱 불어넣습니다. 가령 작중 주로 조명되는 레오 실라르드 박사는 미 행정부에 원자폭탄 개발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그 탄생에 깊게 관여하였으나, 누구보다도 그 위력에 통탄하고 실전 투입을 강력히 막기 위해 애쓰며 박사 개인 더 나아가 과학자 집단의 양면성과 입체성을 부각시킵니다. 또 어떠한 정보도 제공되지 않음은 물론 누구에게도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진행된 비인간적인 플루토늄 인체실험에 희생된 사람들과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관계자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대의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그림자를 폭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 드라마가 제일 강조되는 부분은 아마 '히로시마의 그림자'일 겁니다. 폭심지에서 불과 250m, 은행 계단에 앉아있다가 순식간에 증발해버려 신원조차 파악할 수 없이 검은 그림자만이 남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작가는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이들은 가해자이자 전쟁의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나, 개개인의 삶을 비추어 보면 피해자이기도 했음을 핵무기가 사용된 유일무이한 현장을 통해 강조합니다. 동시에 그는 화자 우라늄의 말처럼 전쟁으로 사라진 이름 없는 사람들 중 한 명이자 핵전쟁의 공포를 전달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다만 일본은 어째서 원자폭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당위성 묘사의 부족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에는 약간이나마 공감하게 됩니다. 난징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 언급이나 수십만의 연합군 포로 강제 노역, 가미카제와 본토 결사항전 등 범죄 행위와 전쟁 수행 의지를 꺾지 않는 모습을 그리긴 하나 인물을 그린 드라마에 상대적으로 얹혀 가는 느낌이 강합니다. 어쩌면 현대의 시류를 상당히 반영한, 원폭 사용에 대한 인류애적 가치에 중점을 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후기에서 알 수 있듯 작가의 절친이 일본인이며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비극'에 중점을 둔듯한 서술이 실린 것을 보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은듯합니다.


나는 대양 하나를 건넜다! 다른 대륙, 다른 나라에 도착했다. 미국!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라고 한다. 나의 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구리로 된 이 거대한 여성이 항구에 도착한 나를 반겨주는 것을 보니, 약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또다시 대양을 횡단할 때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불을 밝히리라!

뭐니 뭐니 해도 본 책은 그래픽 노블, 즉 만화입니다. 만화라면 모름지기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그림이 주가 되어야 할 것이고 [원자폭탄]은 여기서도 완벽에 가까운 대단한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강렬한 흑백 극화로 건조하면서도 강한 대비가 주어져 원자폭탄이라는 끔찍한 병기에 더없이 걸맞은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소개한 대로 하드보일드, 느와르 풍 작화에서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작중 인물들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극화에서 오는 리얼한 인물 묘사와 장면 하나하나의 극적인 연출을 통해 독자로서 하여금 절제되면서도 고양된 감정을 강한 인상과 함께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동세를 이용한 정적인 연출과 동적인 연출, 양쪽 컷 배분과 장면 배분을 통한 분위기 조성 등 예술적으로도 아주 탁월한 작품입니다. 그로브스 준장과 니콜스 대령의 대화는 오직 두 사람의 미묘한 표정 변화와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오펜하이머에 대한 그로브스의 굳건한 신뢰를 잘 나타내며, 플루토늄을 주입하는 인체실험 장면은 적절한 빛의 활용과 눈을 가리고 인간성을 마치 상실한듯한 랭햄 박사의 모습에 흑백임에도 차갑고 비밀스러운 (어쩌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마지막 챕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장면은 칸 하나하나를 빼곡하게 채워 시선을 계속 이동시키면서 동일한 시각-각기 다른 장소를 교차, 촉박하게 흐르는 시간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처참한 투하 현장과 폭탄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조되며 깊은 쓴맛을 남깁니다.


훌륭한 작화와 더불어 치밀하게 구성된 연출은 빠트림 없이 구성된 역사적 내용만큼이나 칭찬받을만하며 [원자폭탄]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인다 평가해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나는 졸고 있다가 어떤 부름을 느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을 느낀다. 점점 빠르게, 점점 강하게. 생명을 얻는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인가? 드디어 해방되어 세상에 날 드러낼 때가 온 것인가?

본 작품은 원자폭탄의 주 재료인 우라늄 원소를 화자로 설정합니다. 이는 원자폭탄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중립적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만 묘사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여겨집니다. 상술한 감정을 배제한 작화와 연출과도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연출을 통해 여러 극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독자로서 하여금 고양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나 정작 화자는 작중 인물들이 언급한 여러 가치에 냉정할 정도로 별 관심이 없으며 아무런 판단 또한 내리지 않습니다. 책의 화자로서 우라늄은 그저 자신이 지닌 무시무시한 위력의 에너지가 세상에 태동하게 됨을 기쁘게 여기뿐입니다.


세상에 자신의 힘을 선보인 우라늄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히로시마의 그림자는 자신이 남긴 서명이며 여전히 지구에는 만개가 넘는 핵무기가 존재한다고. 그의 경고처럼 이것이 겨우 시작이 되지 않도록, 긴 이야기의 끝이 되도록 인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또 통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 경외감이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형상, 세상의 눈앞에 펼쳐진 천상의 광경 앞에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절대적인 힘 앞에서 두려워하라!

책 초장의 추천하는 말에서 언급했듯,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수십 페이지의 글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생각나는 책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 아래서 본서 역시 동일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그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4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에 하드커버 양장으로 제본되어 묵직한 첫인상을 자랑하나, 책을 펼치면 강렬한 흑백 극화체가 독자를 압도하고 상세하게 묘사한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은 독자를 순식간에 역사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태를 빌린 덕에 활자 텍스트로 구성된 과거 어느 출판 서적보다도 강한 몰입감을 자랑합니다.


[원자폭탄 - 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La bombe]는 책 소개처럼 역사책보다 소화하기 쉬우면서 마치 영화처럼 풀어낸, 가히 예술과 역사를 아우르는 역작이라 평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65,000원이란 상당히 비싼 가격이 걸리지만 그 값을 톡톡히 하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 그림자는 나의 서명이다. 아마 내 영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명백히, 내 힘이다. 당신의 뇌리에도 영원토록 박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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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록 - 미국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제국 건들건들 컬렉션
폴 배럿 지음, 오세영 옮김, 강준환 감수 / 레드리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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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동네 문방구에서는 학습용 교보재나 필기구 등 외에도 여러 장난감을 구비해놓곤 했습니다. 특히나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장난감 BB탄총이었죠. 그런데 층층이 쌓여있는 장난감총들 중에서도 유독 글록이란 시리즈의 권총만은 못생긴 외형 때문에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일부 예외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접하는 글록의 첫인상이 "못생겼다."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한가 봅니다.

기존의 권총들과는 다르게 통짜 직육면체 모양 플라스틱 슬라이드에 해머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대적이고 미니멀하면서도 투박하기 짝이 없는 글록은 진짜 권총보단 어린이용 장난감총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글록 17을 처음 접한 미국인 총기 작가가 반사적으로 "우와, 못생겼네."라는 말을 내뱉은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글록이 그렇게 못생긴 외형을 가진 데에는 그간 정형화된 자동권총의 규범을 깨면서 사용자의 편의성에 집중한 탓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첫인상과는 다르게 동 시기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훌륭한 성능으로 순식간에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못생겼지만 모두가 원하는', '플라스틱 결정체'가 되었죠. 총기의 성능만큼이나 글록 사의 마케팅 전략과 영업 기법도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글록이 범죄자, 경찰, 피해자 할 것 없이 미국을 지배하는 권총의 자리에 올랐다고 설명하기엔 부족합니다.


폴 배럿 저 [글록: 미국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제국]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글록 사의 이러한 어두운 성공기를 조망합니다. 글록이라는 총기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성능은 어떤지 또 각국에서 어떻게 운용되는지를 미주알고주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폴 배럿의 책은 "글록이 어떻게 미국의 총기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충실히 답할 뿐입니다.

처음 글록은 우수한 성능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경찰용 신형 권총으로 채용되었고, 이어 할리우드와 힙합 래퍼들에게 선택받으며 대중문화에 노출됩니다. 총기 규제라는 역풍을 맞으면서도 글록 사는 비판과 공격을 이겨내어 도리어 매출을 올리기까지 합니다. 폴 배럿은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로 이러한 글록의 성공기를 서술합니다. 그러나 그의 건조한 문체 속에는 글록의 교활한 진면목이 숨겨져있습니다.

글록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하고 충실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었죠. 연이어 터지는 총기 사고들과 총기 규제론자들의 공격 속에서도 글록은 어떻게 해야 이윤을 낼 수 있을까라는 원칙 하나에 의거해 움직였습니다. 글록은 언제나 사회적 분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중도적이고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법과 총기 규제론자들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지지 세력과 사람들의 공포 심리를 활용하였습니다. 결국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글록은 오히려 이슈 자체를 마케팅 효과 삼아 인지도를 높이고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글록에게 있어 자신들의 상품이 가져오는 사회적 파장과 영향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이윤 추구적인 글록의 행보는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에서 훗날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비도덕적 비윤리적이라 평가받습니다. 물론 글록은 이런 평가에 개의치 않습니다. 자신들의 총기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서 어떻게 사용되든지 간에 꿋꿋하게 오직 수익만을 창출하기 위해 행동하고, 또 이익을 위해서라면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각종 수단을 동원해나갈 뿐이죠.

폴 배럿은 글록 사의 마케팅과 영업 기법이 우습게도 총기 회사들의 가장 큰 적, 다름 아니라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또 대성공을 거두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 이러한 글록의 '역경 극복기'를 통해 미국 사회가 총기 규제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까지 전하고 있죠. 얼핏 우리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게 강력한 총기 규제로 민간에서 총을 접할 일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 국가니까요.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째서인지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취급할 순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본 책은 글록이라는 총기, 인물 그리고 기업이 어떻게 미국의 총기 시장을 장악하였는지에 훌륭한 논픽션임과 동시에, 글록을 전형적인 미국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공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즉, 달리 말하여 글록이 총기 규제론자들의 공격을 무력화한 방법을 통해 기업에게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시민사회의 시도가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함께 시사하고 있죠.

처음 미국에 진출할 때 직면한 '하이재커의 전용 무기'라는 오명, 정확한 사유가 밝혀지지 않은 오작동 및 폭발 사고, 킬린 학살 이후 등장한 공격용 무기 금지법과 몇 년째 이어지는 총기 규제 진영의 압박 등 글록을 대상으로 한 공격은 거의 모두 실패했습니다. 매번 글록을 교묘한 해결책을 찾아내 날카롭게 파고들어 돌파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글록이 파고들었던 돌파구는 바로 감정적이고 희박한 근거에 의존하는 총기 규제론자들의 실책과 논리적 허점에 있었습니다. 저자가 지적했듯 아직까지도 진영 논리와 왜곡에서 벗어난 총기 규제 논란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 연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즉 정확하게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기업에 책임을 묻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 글록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글록: 미국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제국]은 300쪽이 넘는 논픽션임에도 (책 뒤표지 문구의 내용처럼) 테크노 스릴러 소설을 읽듯 몰입감이 상당합니다. 한 기업의 성공을 추적하며 따라오는 추악한 인간의 면모와 몰락, 대중들은 미처 알 수 없었던 사회 시스템적인 모순 등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는 마치 하나의 서사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눈에 피로가 가지 않는 적절한 활자 크기와 줄 간격 등 하드웨어적인 면도 한몫했겠죠.

본서는 제목과 다르게 단순히 글록이란 총기를 좋아하는 밀리터리 마니아들보다는 대체로 사회문제나 기업 경영 등에 관심이 많은 분들께 더 적합한 책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본 책을 비전문가 취미인들이 등한시하는 부분을 끄집어내고 우리의 시야를 넓혀줄 수 있도록, 밀리터리 마니아분들에게도 강력히 권하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폴 배럿이 시사하고자 한 문제를 고찰하지 않더라도 미국 총기 시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사회와 문화에서 총기가 가지는 의미가 어떤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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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
로널드 스멜서 외 지음, 류한수 옮김 / 산처럼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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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의 범죄 행위에서 독일국방군이 자유로울 수 없었고 오히려 깊게 관여되어 있었단 사실이 1980년대 말부터 학계에서 조명을 받기 시작하였고 냉전 종결과 함께 국방군의 전쟁범죄 연구는 더욱 박차를 가해 그간 서구권을 지배하던 "깨끗한 독일국방군" 이론은 허구성이 낱낱이 파헤쳐 졌습니다. 볼프람 베테 저 [독일 국방군], 죙케 나이첼 저 [나치의 병사들] 등의 해외 서적들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고,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의 저자 최호근 교수분처럼 국내에서도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한 독일군을 폭로하는 연구 결과물을 내놓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렇듯 나치 독일 그중에서도 독일국방군이 자행한 홀로코스트 연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된 바 있고 또 현재도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독일군을 중심으로 한 전사 연구 역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오히려 홀로코스트 연구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곤 합니다. 여전히 본인을 포함한 많은 취미인들은 독일군의 군복과 병기들을 좋아하며 그들이 참여한 전쟁, 수행한 작전을 독자적으로 분석하여 독일군이 통상적으로 동시대에서 가장 우수한 전투력과 효율을 갖춘 집단이었다 평가합니다. 이러한 취미인들의 연구에서는 독소전에 만연했던 나치 독일의 끔찍한 범죄 행위가 말소되거나 외면당하기 일쑤입니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대중에게는 독일국방군을 "신사적이고 명예로웠던 훌륭한 전사들"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이는 학계의 주류 의견을 완벽히 역설하는 것입니다. 저자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는 본 책을 통해 현대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사라진 채 낭만화된 2차대전과 이것을 조장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군사 서브컬쳐 향유자들의 취미 활동에 깊숙이 숨겨진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의 인종적 정치적 측면과 범죄를 회피하고 오직 영웅적인 신화를 떠받들어 낭만화된 전쟁을 즐기게 되는 모습을 말입니다. 책에서 지적했듯 직접적으로 독일국방군의 전쟁 범죄 행위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맥락이 제거된 "순수한 군사사적 가치"에만 집착하는 것 역시 간접적으로, 미온적으로 충분히 그릇된 역사관에 동조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군을 우상화하는 행위는 사회 내 인종주의를 강화하고 대중에게서 파시즘에 대한 경각심을 옅어지게 만드는 현상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도 지목됩니다. 저자는 미국 내전, 남북전쟁 이후 남부 연맹을 미국이란 연합국가에 다시금 통합시킨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패배한 대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던 적이 이미 있다 지적합니다. 전쟁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전투의 폭풍 속 위대한 싸움만을 주목하고 피해자들의 희생과 고통을 망각하는 모습은 미국 내전 이후 진행된 수정주의적 역사 편찬 과정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아직까지도 은연중에 남부 연맹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며 이들이 은연중에 극우 인종주의를 기저에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과연 독일국방군 팬보이 집단을 무결하게 취미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로만 여길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명백한 전쟁범죄의 주체이자 가해자 집단이었던 나치 독일과 그에 협력한 독일국방군은 "야만적인 볼셰비즘으로부터 유럽을 지켜야 했던 명예로웠던 전사들"로 탈바꿈했습니다. 비단 독일군을 중심으로 하지 않더라도 군사 분야에 낭만적인 감정을 이입하는 대다수의 밀리터리 덕후 취미인들께선 스스로의 시각을 자기반성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마련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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