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자폭탄 - 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 ㅣ 건들건들 컬렉션
디디에 알칸트.로랑 프레데릭-볼레 지음, 드니 로디에 그림, 곽지원 옮김 / 레드리버 / 2021년 12월
평점 :
20세기가 개막하고 벨 에포크 시대의 낭만에 젖어있던 서구 문명은 총력전의 시대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근현대 100여 년간 발전시킨 과학, 산업, 문화, 정치의 종착지는 모든 전쟁을 끝내고자 시작한, 그러나 더욱 거대한 후속작을 자랑하게 된 양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는듯했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양차 세계대전 시대 막바지에 탄생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병기가 등장함에 따라 반세기를 지배한 총력전이란 전쟁의 형태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원자폭탄 그리고 핵전쟁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이 위대한 병기가 탄생하게 된 과정은 과학적 호기심과 열렬한 애국심에 기반한 흥미롭고 경이로운, 그리고 한편으론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의 냉혹하거나 참혹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잔혹하면서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야기들이죠. 프랑스 출신 만화가 디디에 알칸트(Didier Alcante, 로랑 프레데릭-볼레Laurent-Frédéric Bollée, 드니 로디에Denis Rodier는 원자폭탄 개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래픽 노블로 엮어냈습니다. 원자폭탄을 둘러싼 장대한 대서사를 다룬 역작 [원자폭탄 - 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La bombe)]입니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이 흥미로운 생명체들은 언젠가 내 운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들끓는, 이 요동치는 에너지를 해방시킬 자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 이제 세상에서 위대한 과학자들이 나에게, 나의 성질에 관심을 가진다. 머지않아 나의 때가 올 것이다.
내 전기의 새로운 장을 쓸 시간이 왔다.
[원자폭탄]은 제목 그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 원자폭탄의 탄생을 다룬 그래픽 노블입니다. 인류 지성의 상징 과학자 집단이 처음 무기를 제작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러한 건의에는 세계를 광기로 몰아넣은 끔찍한 전쟁을 종결시키고 더 나아가 핵 균형에 의한 평화와 국제정부 수립이란 합리적 목표가 깔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완성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과학자들이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두려운 것이었죠. 가공할 만한 위력의 에너지를 인지하고 폭탄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때부터 맨해튼 프로젝트가 수립되고 원자폭탄 개발에 박차가 가해지는 과정은 물론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완성된 핵무기가 히로시마에 떨어지는 시점까지, 본 책은 각종 사건 그리고 사람들이 얽히고설킨 원자폭탄의 이야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촘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 상당히 입체적이란 평가를 내리고 싶은데, 미국이 폭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해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에 더해 원자폭탄을 두고 벌어진 세계 각국의 사건들 그리고 잘 조망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시도와 노르웨이 중수 공장 습격, 인디애나폴리스함 침몰 사건과 같은 내용들이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고 스파이 분량에 짧게나마 얹어간 소련의 핵 개발 시도와 포츠담 회담에서의 팽팽한 외교적 긴장 관계는 곧 다가올 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핵무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그래픽 노블-흔히 말하는 만화책임에도 총체적인 내용 면에서 어떤 다른 역사책들에 밀리지 않는 방대한 정보량을 갖췄음이 대단합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나의 열렬한 신봉자일 것이다.
마치 나 덕분에 미군 백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믿으면서 말이다.
비밀리에 플루토늄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총 18명이었다.
이 18명 중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당연히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그는 특이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미국에 폭탄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했지만... 나중에는 폭탄 사용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자신의 피조물이 가진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죽이려 한 것이다!
나는 은행 앞에 앉아 있던 이 남성을 기억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바로 그 시각에 나도 해방되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다시 먼지가 되어버린 먼지 한 톨에 불과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핵무기 개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여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며 책의 흐름에 숨결을 더욱 불어넣습니다. 가령 작중 주로 조명되는 레오 실라르드 박사는 미 행정부에 원자폭탄 개발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그 탄생에 깊게 관여하였으나, 누구보다도 그 위력에 통탄하고 실전 투입을 강력히 막기 위해 애쓰며 박사 개인 더 나아가 과학자 집단의 양면성과 입체성을 부각시킵니다. 또 어떠한 정보도 제공되지 않음은 물론 누구에게도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진행된 비인간적인 플루토늄 인체실험에 희생된 사람들과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관계자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대의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그림자를 폭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 드라마가 제일 강조되는 부분은 아마 '히로시마의 그림자'일 겁니다. 폭심지에서 불과 250m, 은행 계단에 앉아있다가 순식간에 증발해버려 신원조차 파악할 수 없이 검은 그림자만이 남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작가는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이들은 가해자이자 전쟁의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나, 개개인의 삶을 비추어 보면 피해자이기도 했음을 핵무기가 사용된 유일무이한 현장을 통해 강조합니다. 동시에 그는 화자 우라늄의 말처럼 전쟁으로 사라진 이름 없는 사람들 중 한 명이자 핵전쟁의 공포를 전달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다만 일본은 어째서 원자폭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당위성 묘사의 부족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에는 약간이나마 공감하게 됩니다. 난징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 언급이나 수십만의 연합군 포로 강제 노역, 가미카제와 본토 결사항전 등 범죄 행위와 전쟁 수행 의지를 꺾지 않는 모습을 그리긴 하나 인물을 그린 드라마에 상대적으로 얹혀 가는 느낌이 강합니다. 어쩌면 현대의 시류를 상당히 반영한, 원폭 사용에 대한 인류애적 가치에 중점을 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후기에서 알 수 있듯 작가의 절친이 일본인이며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비극'에 중점을 둔듯한 서술이 실린 것을 보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은듯합니다.
나는 대양 하나를 건넜다! 다른 대륙, 다른 나라에 도착했다. 미국!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라고 한다. 나의 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구리로 된 이 거대한 여성이 항구에 도착한 나를 반겨주는 것을 보니, 약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또다시 대양을 횡단할 때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불을 밝히리라!
뭐니 뭐니 해도 본 책은 그래픽 노블, 즉 만화입니다. 만화라면 모름지기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그림이 주가 되어야 할 것이고 [원자폭탄]은 여기서도 완벽에 가까운 대단한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강렬한 흑백 극화로 건조하면서도 강한 대비가 주어져 원자폭탄이라는 끔찍한 병기에 더없이 걸맞은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소개한 대로 하드보일드, 느와르 풍 작화에서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작중 인물들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극화에서 오는 리얼한 인물 묘사와 장면 하나하나의 극적인 연출을 통해 독자로서 하여금 절제되면서도 고양된 감정을 강한 인상과 함께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동세를 이용한 정적인 연출과 동적인 연출, 양쪽 컷 배분과 장면 배분을 통한 분위기 조성 등 예술적으로도 아주 탁월한 작품입니다. 그로브스 준장과 니콜스 대령의 대화는 오직 두 사람의 미묘한 표정 변화와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오펜하이머에 대한 그로브스의 굳건한 신뢰를 잘 나타내며, 플루토늄을 주입하는 인체실험 장면은 적절한 빛의 활용과 눈을 가리고 인간성을 마치 상실한듯한 랭햄 박사의 모습에 흑백임에도 차갑고 비밀스러운 (어쩌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마지막 챕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장면은 칸 하나하나를 빼곡하게 채워 시선을 계속 이동시키면서 동일한 시각-각기 다른 장소를 교차, 촉박하게 흐르는 시간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처참한 투하 현장과 폭탄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조되며 깊은 쓴맛을 남깁니다.
훌륭한 작화와 더불어 치밀하게 구성된 연출은 빠트림 없이 구성된 역사적 내용만큼이나 칭찬받을만하며 [원자폭탄]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인다 평가해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나는 졸고 있다가 어떤 부름을 느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을 느낀다. 점점 빠르게, 점점 강하게. 생명을 얻는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인가? 드디어 해방되어 세상에 날 드러낼 때가 온 것인가?
본 작품은 원자폭탄의 주 재료인 우라늄 원소를 화자로 설정합니다. 이는 원자폭탄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중립적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만 묘사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여겨집니다. 상술한 감정을 배제한 작화와 연출과도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연출을 통해 여러 극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독자로서 하여금 고양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나 정작 화자는 작중 인물들이 언급한 여러 가치에 냉정할 정도로 별 관심이 없으며 아무런 판단 또한 내리지 않습니다. 책의 화자로서 우라늄은 그저 자신이 지닌 무시무시한 위력의 에너지가 세상에 태동하게 됨을 기쁘게 여기뿐입니다.
세상에 자신의 힘을 선보인 우라늄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히로시마의 그림자는 자신이 남긴 서명이며 여전히 지구에는 만개가 넘는 핵무기가 존재한다고. 그의 경고처럼 이것이 겨우 시작이 되지 않도록, 긴 이야기의 끝이 되도록 인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또 통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 경외감이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형상, 세상의 눈앞에 펼쳐진 천상의 광경 앞에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절대적인 힘 앞에서 두려워하라!
책 초장의 추천하는 말에서 언급했듯,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수십 페이지의 글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생각나는 책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 아래서 본서 역시 동일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그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4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에 하드커버 양장으로 제본되어 묵직한 첫인상을 자랑하나, 책을 펼치면 강렬한 흑백 극화체가 독자를 압도하고 상세하게 묘사한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은 독자를 순식간에 역사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태를 빌린 덕에 활자 텍스트로 구성된 과거 어느 출판 서적보다도 강한 몰입감을 자랑합니다.
[원자폭탄 - 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La bombe]는 책 소개처럼 역사책보다 소화하기 쉬우면서 마치 영화처럼 풀어낸, 가히 예술과 역사를 아우르는 역작이라 평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65,000원이란 상당히 비싼 가격이 걸리지만 그 값을 톡톡히 하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 그림자는 나의 서명이다. 아마 내 영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명백히, 내 힘이다. 당신의 뇌리에도 영원토록 박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