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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세트 - 전2권 - 신영복 1주기 특별기획 ㅣ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존경하는 신영복 교수님께,
선생님! 대체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두어 달간 고민하다가 예전에 선생님을 찾아 뵐 때면 준비했던 편지 형식의 레포트를 쓰기로 했어요.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이에 관한 고민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알게 된 선생님의 애제자 한 분으로부터 저는 ‘작가가 돼야 하니까 일기 형식으로라도 글을 꼭 쓰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선생님의 ‘죽순의 마디는 뿌리에서 배운 것’이고 ‘대나무는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는 것’이라는 글을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신영복’이라는 뿌리에서 비롯된 대나무들인 셈이니까, 이제 죽순 정도인 저는 그 ‘애제자 대나무’의 이야기를 통해 뿌리인 선생님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 손길을 거치지 못하고 만들어진 선생님의 책 두 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찬찬히 읽어가던 중에 ‘행복’에 관하여 언급하신 대목에서 한동안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선생님께 이러한 레포트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2007년 2학기 때 ‘행복’을 주제로 한 인터뷰를 요청드리기 위해 강의실로 찾아갔던 것으로부터 시작되니까요. “낮은 곳으로 다가가는” 삶을 실천하다 20년 20일 동안 수형 생활을 하셔야 했던, 그리고 여전히 물과 같이 낮은 곳으로 향하는 선생님께 어쩌면 행복을 상품화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던 제가 ‘입장이 전혀 다른 행복’을 여쭙는 게 아이로니컬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저는 그래서 꼭 선생님께 듣고 싶었어요. 예상한 대로 저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당했습니다. 근데 그때 저는 참 부끄러웠어요. 인터뷰 섭외가 실패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저의 태도 때문에요.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에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성찰을 계기로 선생님과의 본질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어요. 이왕 교실까지 왔으니 계속 강의를 청강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시간까지도 바쁜 직장에서 근무하다보니 결석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해 겨울에 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인터뷰를 거절하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겨울철인 만큼 제게 피어 있는 무수한 나뭇잎들 다 떨구어 앙상한 줄기만을 한 번 살펴보는 계기로도 삼아보고도 싶었어요. (몇 년 뒤에 이때 떨구지 못한 나뭇잎들을 다시 떨굴 때도 선생님께는 말 없는 말씀으로 제가 또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드디어 그 이듬해 1학기부터 본격적인 청강을 시작했습니다.
《행복이란 것도 사실 소유나 소비에서 오기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애정과 신뢰, 사람과의 만남에서 오는 것이 진정하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쾅’ 한 대 맞는 듯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린 저는 1993년 2월에 기적적으로 선생님을 뵙고 난 후부터 선생님의 인터뷰가 실린 웬만한 매체의 기사(대담)는 거의 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 말씀을 들려주신 《당대비평》도요. 그런데 당시에는 이 말씀을 놓쳤던 것이 분명해요. 어쩌면 이 인터뷰를 읽을 때 저는 행복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이번에 읽을 때는 이 문장이 단박에 들어왔습니다. 큰 감동으로 새겨졌어요. 제가 당시 들었던 ‘행복’에 관한 고견들 중 이렇게 쉽고 명쾌한 정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행복이란 소유나 소비 행위를 통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애정과 신뢰, 만남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이라는 말씀은 어쩌면 신산한 생애의 굽이를 절절하게 넘어오신 선생님 아니고서는 들려줄 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행복론은 정말 행하기 쉬운 말씀 같지만 제 경험상 보이지 않는 애정과 신뢰에 기반하여 관계와 만남을 이루어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대화는 물론 sns에서 의견을 표출하거나 댓글을 다는 간접적인 소통 행위에서도 이런 마음으로 응하고 싶은데 정말 쉽지 않아요. 저는 언제쯤 선생님처럼 육감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이해하면서 유쾌하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
《그와 한 감방에 있은 지 한 2년쯤 지난 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나한테 와서 “신 선생님, 저 치약 하나 사 주세요” 그래요. “너는 줘도 안 받는 녀석 아냐?” 했더니, 나한테는 한 개 사라달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관계가 시작된 셈입니다. 20년 징역살이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어요.》
2008년 3월에 첫 번째 강의가 끝난 후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연구실로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청강해도 될지, 여쭙는 이야기를 전자우편으로 미리 보내드리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연구실로 찾아간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이것저것 질문하시면서 근황을 살피신 후 강의 녹취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제가 가장 잘하는 일 중의 하나가 녹취작업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제가 녹취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1년간 청강하면서 매주 만들어드린 녹취록은 나중에 제본집으로 만들어드렸고, 이것은 선생님의 마지막 저서인 《담론》에 반영되었는데, 제게는 《담론》이 출간되었을 때보다 녹취록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을 때가 훨씬 더 큰 기쁨으로 남아 있어요. 제가 선생님께 손톱만큼이라도 도움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처럼 더 좋은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1주기 기념집을 읽으면서 이 구절들을 만나 가슴 벅찬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말도 없고 표정도 어두운 젊은 친구”가 2년쯤 후에 선생님께 무조건 신뢰를 보여준 일이 20년 징역살이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면, 선생님께 녹취록을 만들어 드린 일이 제게는 앞으로 살아갈 시간 중 가장 가슴 뛰게 하는 기억으로 살아 있게 할 추체험의 시간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10년 전에 제가 인터뷰를 통해 선생님께 듣고 싶었던 ‘행복’에 관한 말씀을 이렇게 긴 시간을 지난 뒤에 몸과 마음으로 직접 체득할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 대목에서만큼은 선생님께서 옛날 영화에서 세월이 지나간 것을 보여줄 때면 보게 되는 ‘꽃 가득 핀 장면, 눈이 내리면서 꽃이 지는 장면, 이런 장면을 반복해서 두 번쯤 보여준 다음 ‘10년 후’라는 자막이 화면 가득 나오는’ 신으로 그려져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라면 그 다음 장면으로 선생님께서 들려주시곤 했던 시구가 이어지게 하고 싶습니다. 서산대사가 당신의 영정 뒷면에 쓰셨다는 시입니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선생님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추체험하여 재해석하는 일은 제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이러한 기쁨의 순간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서 이 순간들이 층층이 놓인 행복의 탑을 무수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쌓아보고자 합니다. 비록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 (성공회대 청강생일 때를 포함해 한 번도 저의 레포트에 점수를 주신 적이 없는 선생님! 저는 늘 저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가 궁금했어요. 근데 한 번도 용기 내서 여쭤보지 못했어요. 여쭤볼걸!)
우선 교도소를 학교로 만들어야 됩니다. 징역의 현장보다는 ........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교도소가 될 수 있게 해야지, 그 사람들을 응보 형 위주로 보복 형 위주로 해서 징역을 살린다는 이런 행형 정책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빈곤층에게는 우선 시급한 것이 절대적인 빈곤으로부터의 구제이겠으나, 제가 잠깐 느낀 것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들이 하는 일 자체에 대해 정직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는 일에 대한 긍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돈으로 보상된 액수만큼 긍지를 느끼는 이러한 사회의 가치 풍토에 대해서 새로운 비판 같은 것이 일어나야 되지 않겠는가 봅니다.
돈 많이 받는 일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돈 적게 받는 일은 가치가 없고, 또 자기가 일한 만큼 정직하게 보수도 받지 못한다면 가난하고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이중의 질곡 밑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정직한 보수와 정직한 평가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사회적인 가치 기준도 시급하게 확립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는 겉으로 보기엔 좌와 우의 옷을 입고 다투지만, 사실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봐요. 무상급식 하면 ‘돈 더 내지 않을까‘ 이것이 핵심이죠. 그런데 이런 문제는 가려지고 좌우로 치환돼서 나타납니다. ‘좌‘라는 것은 조금 불편하지만 뭔가 현 단계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가치 지향을 하자는 거고, ‘우‘라는 것은 현재의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지키자는 겁니다. 둘 다 좋은 거고, 공존해야 하는 거죠.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 속에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자기 재구성 능력히 훨씬 중요하지요. 감옥에서는 전혀 예상치도 않게, 자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 밖에 있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들과 만나게 되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사연들을 접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팔만대장경이지요.
깨닫는다는 것은 다양한 수평적 정보들을 수직화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지요. 절대로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혼란만 더하지요. 그 많은 정보를 수직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재구성 능력을 높이는 게 바로 공부이고 학습니다.
우리 사회에 구조화되어 있는 그런 콤플렉스, 열등감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고,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한 온당한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상이 없습니다. 콤플렉스란 대등한 파트너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상태입니다. 관계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이 없는 상태지요. 철학적으로 스스로 타자가 된다고 하지요. 이러한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나 해방을 이야기하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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