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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좀 빌려줘 ㅣ 사계절 1318 문고 136
이필원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평점 :
‘일탈’, 단어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학교와 직장을 벗어난 산과 바다에서, 또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무료한 일과의 지루한 반복을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
이필원 작가의 책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색다른 일탈을 표현한 소설집이었다. ‘우리반 전학생이 혹등고래라면? 호랑님의 생일에 초대된다면? 골동품에 잠든 용을 만난다면? 붕어빵을 파는 도깨비를 만난다면?’처럼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을 벗어나 평범한 상상의 허들을 훌쩍 뛰어넘는 ‘현대적인 민담’들이 등장한다.
<지우개 좀 빌려줘>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학생의 정체가 정말 고래가 맞는지 확답할 수 없었다. 내가 느낀 이야기의 중심은 그것의 사실유무 보다는 사춘기 소년 우성의 두근두근하고 설레는 풋사랑의 느낌이었다.
<호랑님의 생일날이 되어>나 <우는 용>, <호박마차>는 호랑이, 용, 도깨비와 같은 소재에서 판타지나 무협 같은 장르 소설의 느낌을 받았고 생명(삶)이라는 중심 테마에 대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랑님의 생일날이 되어>에서 고운의 삶의 의지를 지켜주는 호랑님의 모습이 전래 동화의 산신령을 떠오르게 하였고, <우는 용>은 죽어가는 수완과 함께 울어주고 곁을 지켜주는 용의 모습이 누군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반면 <안녕히 오세요>, <우주장>처럼 지구라는 공간적 제약을 벗어난 공간에 대한 sf 느낌의 단편들도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특히 sf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안녕히 오세요> 같은 경우 음모론의 형성 과정과 확인 불가능한 추론에 대한 미묘한 결말은 작품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우주장>은 은채의 베스트 프렌드인 할머니와의 이야기가 <지우개 좀 빌려줘>의 우성이와 전학생의 이야기와는 다른 느낌의 이별을 느끼게 했다.
만남, 이별, 자아 정체감 등의 주제는 변치 않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화두인 것 같다. 진부할 수 있는 이 주제들을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로 신선하게 접근하게 해준 이필원 작가님의 다음 작품들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