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 투병중 김일성 회고록 분석 논문을 남긴 고 이명영 교수님의 논문이 한 데 엮여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 돌아가신 지 21년 만이다. 원고를 받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출판하게 된 것은 법정에서 위험한 재판이 진행중이기 때문으로 지급의 일이었다. 오자 몇 개가 눈에 띄어 재판에서 바로 잡았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멋지게 나왔다. 함께 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린다. 저자인 이교수님도 중간 중간에 긴 한숨을 남기셨지만 이 책을 에디팅하는 중에 몇 차례 현기증이 일었다. 김일성이 공적을 낚아채어 간 항일 투쟁사에 어린 핏자국이 너무나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되던 해 감옥에서 숨진 [권영벽]이라는 분에게 크게 관심이 간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세기 후반에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떠올리면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항독 항일을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견도 있지만, 당대의 관점에서 독일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이기는 것도,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도 목숨을 걸어볼 가치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김일성은 그런 순수한 열망조차 모두 자신의 공적으로 앗아가 우리 민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만주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맞서 싸웠던 이름없는 전사들을 품어줄 품도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김일성 회고록 출판 소동으로 빛을 보게 된 이명영 교수의 저서는 우리 역사의 사각지대에 빛을 주는 작업이 되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권영벽]아명은 창욱(昌郁). 함경북도 경성군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중국 간도지방의 연길현(延吉縣)으로 이주하였다. 용정(龍井)대성중학(大成中學)을 다니다 중퇴하였으며, 재학중 반일학생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 3월 항일유격대에 가입하였다.1936년 9월김일성(金日成)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위해서 장백지구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현지인 이제순(李悌淳)과 연계하여 조국광복회 조직확대작업을 전개하였다.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활동하였으나, 1937년 10월 일제에 의해서 검거되었다.이것이 1937년 10월과 1938년 7월의 두 차례에 걸쳐서 함경남도 북부지방과 장백현 일원의 조국광복회 조직원 739명이 검거되는 이른바 ‘혜산사건’이다. 1941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45년 3월에 광복을 불과 5개월 앞두고 형이 집행됨으로써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영벽(權永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