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열전 - 3.1운동의 기획자들.전달자들.실행자들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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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제헌 헌법에도 적혀있듯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거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뒤 맥락을 뚝 끊어 기미년 3월 근처만 다루었으니 알맹이 없이 맹한 느낌입니다. 타도를 외치는 요즘 시위와 달리 이미 독립이고 만세라는데 이런 철학적 차이도 훌렁 지나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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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선명한 윤곽선 안쪽을 꼼꼼히 채색한 그림을 그린다. 사람에 의해 재해석된 시각 장면인 그림과 달리, 장면을 그대로 담아내는 사진에는 빛의 밝기에 따라, 색채의 차이에 따라, 사물간의 경계가 흐리기도 하고 선명하기도 하다. 실제 시각 세상에는 사물간의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며, 그림 속의 윤곽선은 우리의 뇌에서 추론해낸 것이다. 실제로 윤곽선이 모호한 그림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윤곽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채색하여 배경과 인물의 경계를 흐린 피카소의 <모자상>이나 김호도의 풍속화에서 그러한 생생함을 발견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윤곽선을 추론해내는 경향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좋은 삶을 살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극단적으로 칸트와 같은 철학자는 욕망에 사로잡힌 육체적 존재로서의 본성은 도덕법과 적대적이므로, 도덕법을 받아들이는 이성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는 자연스러운 감성은 어딘가 못미덥고 부정적이며, 이성으로 이 열등한 부분을 통제해야 한다는 우열이 가정되어 있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이기적인 본성과 싸우며 개인의 생존과 공동체의 선을 고통스럽게 저울질해야 한다. 자신의 생존이 걸린 이 저울질에서 저울추는 종종 자신을 위하여 기울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온난화는 계속되며, 공공재는 감소하고, 양적 완화를 거듭해도 돈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며 살기가 각박해진다.

 

 

 이성과 감성에 대한 많은 이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이성과 감성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뇌에는 이성을 다루는 영역과 감성을 다루는 영역이 따로 있지 않으며, 소위 이성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정신 작용과, 감성이라고 부를만한 정신 작용의 경계 또한 모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우리가 이성이라고 불러왔던 정신 작용 또한 우리가 믿는 것처럼 냉철하고, 완벽하고 논리정연하지 않다. 최대한 냉정하고 논리적으로 계산하면서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샌가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공리주의에서 우리는 이성의 불완전함을 발견한다.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대상 또한, 좋다거나 나쁘다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 들어오면 소화를 시키고, 상한 것이 들어오면 복통을 일으키는 장이 좋거나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한 적응적 반응일 뿐이다. 심지어 인간 감성은 많은 ‘이성’이 굳게 믿는 것처럼 이기적기만 한 것도 아니고 대단히 이타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성과 감성을 굳이 나누고, 이성에는 좋음이라는 딱지를, 감성에는 불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유난스러운 고집은 계몽주의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서구 사상가들의 주장에서 그러한 구분과 우열이 두드러진다. 이성과 감성의 구분은 꼭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언제, 왜 시작되었는가?

 

 

 나약한 인간이 상대하기에 자연은 너무도 거대하고 강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 두려움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자연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을 발전시켰고, 어떤 이들은 인간을 자연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시켰으며, 자연보다 강한 힘을 가진 절대신을 앞세워 인간을 지키고자 한 이들도 있었다. 서구에서 취한 것은 맨 마지막의 방법이었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죄를 대신 지고 떠났다. 인간은 마땅히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서는 신에 대한 인간의 해방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인간을 자연 위에 둘 근거를 상실하는 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이성이라고 한다.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으며 이 이성을 가지고 대항해를 떠나고 기계를 만들어 자연을 부린다고…. 이성과 감성을 구분하고, 둘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태도의 이면에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태도가 있었다.

 

 

 신은 버릴 수 있어도 스스로를 낮추기는 어려웠던가. 진화론이 나온지 200여년이나 지났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진화라는 연속선상의 한 가지일 뿐이라는 인식은 아직 내면화되지 못한 듯 하다. 굳이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 아니어도 진화론은 여러 분야의 담론에서 아직도 심심찮게 등장하니, 어지간히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내가 딛고 선 땅이 돈다는 지동설도 이렇게 오래 싸울 필요는 없었건만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계급 아닌 계급 인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겸허해지기는 커녕 생명에까지 계급 인식을 투여한 우생학이 생겨났다. 머리 좋은 하버드생이나 외모가 뛰어난 이들의 정자며 난자를 판매하는 시장에서, 인간 유전자 조작을 연구하는 기술에서, 나는 차마 우생학이라고 불리지 않을 뿐인 우생학을 본다.

 

 

 인간은 자연에서 똑 떨어져나온 존재로, 그것도 자연 위에 선 존재로 인식되어야만 하는가? 서구 사상의 모태로 여겨지는 그리스에서도 이러한 인식 구도가 당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는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가 나오고, 바다와 대지와 태양을 대표하는 신들이 있으며, 신과 사람이 사람과 동식물의 모습을 오가곤 한다. 고대 이집트에도 그러한 신들이 있으며, 단군 신화의 곰과 호랑이에서 우리는 토테미즘을 발견한다. 심지어 도가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물처럼 자연스러운, 자연을 닮은 삶을 주창한다. 즉,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 계급을 두는 시각은 유일한 정답도, 보편적인 시각도 아니다. 이러한 시각은 생물 분류학의 선구자이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독교가 받아들이면서 서구인들의 세계관에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우생학에서부터 이기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과 공동선의 고통스러운 저울질의 근원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에 대한 구분과 우열이 있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에 분명한 윤곽선을 긋고 우열을 지으면 세상은 참으로 명쾌해진다. 그러한 구분을 통해서 논리적인 분석이 가능해지고, 과학도 가능해지고, 구분된 계층에 대한 투쟁을 통해 자유, 평등, 다양성이라는 귀중한 개념이 탄생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이들 개념이 현실에서 실현된 형태이다. 하지만 사진에는 없는 그림속 윤곽선처럼, 구분과 우열은 인간의 지각에 근거하여 인위적으로 매겨진 것이기에, 이러한 편의가 통용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면 그만 장애물이 되고 만다. ‘와! 이렇게 명쾌한 게 다 있구나!’ 하고 기뻐서 손을 뻗었는데 얼마 못 가서 딱딱한 벽이 만져지는 식이다. 그래서 구분과 우열은 태초부터 모순과 투쟁을 내재하고 있다. 서양 열강들이 자로 그린 아프리카 국경을 따라 종족간 종교간 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 처럼…

 

 

 다른 시각도 있다. 노자는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엇을 무엇이라 구분하고 한정짓는 순간, 그 무엇은 영원하고 보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노예 제도처럼 인식과 개념과 제도는 상황의 제약을 받는 것으로서 보편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하지만 특수한 개별 상황이 일반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상대론은 사람을 참 하릴없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건지… 어떤 법이나 이름이나 제도가 보편절대적인 진리가 못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특수한 개별 상황들을 살아가고 있다. 결국, 상대론은 상대성을 여러 개별 상황에 일반화함으로써 특수한 개별 상황을 일반화하는 절대론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한다.

 

 

 불가에서는 한단계 더 나아간다.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닌 까닭에 도라고 이름한다는 주장을 편다. 상대성과 개별성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개별성의 유용함을 인정하되, 개별성에 구속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러한 개별적 상황에 있기에 상황적 특수성을 수용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상대성 또한 인지하고 있으므로 개별성을 일반화 하는데서 생겨나는 모순과 싸움을 넘어서겠다는 논리다. 일체의 단어와 개념이 이미 개체분절적인 속성을 지니므로 개별성을 넘어서려는 도가나 불가의 논리는 언어의 이치에 닿지 않는다. 도대체가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달에 닿지 않는 손가락을 뻗어 달을 가리키며, 손가락 말고, 저 달을 봐달라고 한다.

 

 

 옛 화가들은 실제 시각 장면에는 없는 명확한 윤곽선을 그렸다. 뇌가 구성해낸 윤곽선은 개별 사물을 인식하는데 유용하지만, 선명한 윤곽선을 가진 그림의 생동괌과 자연스러움은 감소하였다. 후대의 미술가들은 윤곽선을 그리되 윤곽선을 부드럼게 넘어 채색함으로써, 윤곽선이 가지는 부자연스러움을 넘어섰다. 구분하고 우열짓는 태도는 민주주의와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발전의 다음 단계는, 구분을 넘어서는 김홍도와 피카소의 그림 같은 것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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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박사 학위는 영어로 PhD, Doctor in Philosophy 라고 쓴다. Doctor in Natural Science 가 아니라 Doctor in Philosophy 인 것은 과학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나온 까닭이다. 갈릴레오와 뉴턴이 실험과 수학을 도입함으로써 가설에 대한 객관적 검증과 재현, 논의에 대한 틀을 제공한 과학 혁명 이전까지 과학은 철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 시절부터 서구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중세를 지배하던 크리스트교의 사상과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어왔다. 하지만 그러한 몸부림 또한 그때까지의 인식틀과 인식 태도, 즉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지 못했다. 천사와 악마의 분리가 명확하고, 신과 닮은 인간을 만물의 우위에 두며, 절대적인 신을 믿었던 크리스트교처럼 과학 또한 서양 세계관의 개체 분별적이고, 인간 중심적이고, 고정불변적인 특성을 이어받았다. 과학의 방법론 또한 그에 걸맞게, 대조군을 통하여 통제변인과 여타 변인들을 분리하고, 종속 변인에 해당하는 항목의 개별 측면을 측량하며, 정규분포를 가정하여 통계적 검사를 하는 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이란 객관적으로 검증, 논의 재현하는 방법론을 갖춘 서양의 철학, 혹은 서양 과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세상에 대한 명제를 설립하는데 서양의 개체분별적 시각만이 아니라 동양의 통합적 시각도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명제를 공유하는 방법은 그동안 서양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길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전하여 점점 더 복잡하고 큰 대상을 다루게 되면서 서양식 과학은 도전을 받고 있다. 유전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여러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되고, 이 유전자의 발현이 다시 유전자들 간의 상호작용,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인 후성유전학 (epigenetics: 에피제네틱스)의 경우를 보자. 유전체 안에는 너무도 많은 유전자가 있기에 유전자간의 상호작용 및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탐색하는 일은, 유전자 하나하나를 변수로 인식하는 기존의 서양과학으로는 대단히 골치아픈 작업이다. 우선, 유전체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유전자 발현 특성이 개인별로 다르기에 이제까지 해 오던 식으로 통제변인을 가려내고 정규분포를 가정한 통계적 검사를 하기가 어렵다. 상호작용을 하는 네트워크 내에서는 두 사람에게 똑같이 A라는 인자가 있더라도 A를 강화하는 인자 B가 있는 사람과 A를 억제하는 인자 C가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 확연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별 유전자 맞춤 의학이 말은 그럴싸 하지만 연구개발이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이다.

 

 

 이러한 난관은 네트워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뇌과학과 기후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구 온난화 대책이 시급하다고 하면서도, 매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변수를 발견했다고 변수 추가해가면서 시뮬레이션만 돌리는 기후과학을 보노라면 참 답답하다. 슈퍼 컴퓨터를 동원하여 계산 능력을 증대함으로써 해결해 보려는 시도들이 많지만 아예 다른 방식의 접근, 다른 패러다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후성유전학과 맞춤 의학이 겪고 있다는 어려움이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가 한의학에서 체질과 조화를 언급할 때 주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동양의 패러다임은 서양의 패러다임과 인식구도가 다르다. 장자의 바람의 비유를 보면 똑같은 바람이라도 피리를 지날 때와, 땅을 지날 때, 숲을 지날 때 내는 소리가 다르다고 한다. 개별적 대상을 인식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대상들간의 변화무쌍한 관계와 전체에 더 집중한다. 절대적 존재를 믿어온 서양인들에게 진화론이나 지구의 역사는 지식인들 사이에 집단 우울증을 유발할 만큼 치명적이었지만 순환과 변화를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동양에서는 고정불변의 무엇인가가 오히려 거북스럽다.

 


한방을 주먹구구식 단순 경험의 누적에 의한 민간 요법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몰라서하는 말이다. 한방에서는 사람에 따라 체질을 나누고, 특정 부분의 기능만이 아닌 전체적 조화를 함께 고려하는 까닭에 정규분포를 가정하고, 통제변인과 측량대상을 구분하여 실험, 측정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침술처럼 체계가 있고 효과가 있으면서도, 얼핏 보아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손을 땄는데 체기가 내려가는 것처럼) 의학자산이 그저 주먹구구식 경험의 누적으로 생겨났다고 보는 쪽이 오히려 무리가 있다.

 

 

같은 동양 국가로서 비슷하게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인도 아유르베다에서도 한방처럼 체질을 나누고, 경혈에 침을 두어 마취를 하고 치료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이 사람들의 손을 잘라 많이 사라졌지만 요새는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 개선이니 미용이니 해서 서구인들이 좋다고 찾아다니고 있다. 통합적인 사고를 하기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있고 상당히 다른 두 문명권에서 이처럼 비슷한 결과를 냈다는 것은, 개체분별적인 서구식 패러다임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통합적 패러다임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패러다임이야 말로 후성유전학이나 기후과학, 뇌과학처럼 네트워크 전체의 통합적 이해가 절실한 부분에서 필요한 패러다임인 게 아닐까.

 


그럼에도 동양적 패러다임을 과학화 해야할 필요성은 아직까지 별로 제기되지 않았다. 우선 동양 철학의 가치부터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 고전이 붐을 일으키는 요즘에도 동양 고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거나 아예 빠져 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권에서 드물게 서양국가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덕분에 서양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이 부족한 편이다. 같은 아시아인이면서 먼저 개화한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보니 전통은 천시하고 서구의 것만 최고라는 인식이 박혀 버렸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이해 부족은 멸시와 신비주의라는 양면으로 드러나곤 하는데, 심지어 이런 신비주의와 멸시까지 그대로 가져다가 동양의 철학을 사이비나 주술로 간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해란 한 입장에서 다른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기에 자기 입장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해 자체가 단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서양 인문만 고전이랍시고 쫓아다니니 바쁘기만 했지 마음속까지 호쾌한 답이 나올 수가 없다.

 


동양 철학에 나오는 음양오행이니 기니 하는 말들은 서구화된 오늘날의 우리가 상응하는 개념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거기에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와 멸시의 선입관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사회화되었고, 여기에 돈과 명성을 노린 사이비들이 가세하여 동양적인 것은 점점 더 못 미덥고 한심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갔다. 전세계 어느 나라들 보다 격동하는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우리 철학의 많은 부분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 한 채 설 곳을 잃었고, 동양의 철학은 우리 것임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고집스레 전통을 고수한 이들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을 지켜내기만도 벅찼기에, 십자군 전쟁 이후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폐쇄적, 방어적으로 변해 버렸다.

 


동양 철학을 업수이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동양철학에 나오는 일부 비과학적인 측면들을 찾아 동양 철학 전체를 싸잡아 비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 서양 과학혁명의 대부인  뉴턴이 연금술에 심취했었다는 이유로 서양 철학과 과학을 통째 버리는 사람은 없다. 서양 철학이 수백년간 과학적 방법론을 개발해 온 것과 달리 동양 철학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고, 그나마도 대체로 외면받아왔다는 사실을 건너뛴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동양 철학을 이해하는데는 센스가 필요하다. 단군신화를 볼 때 환웅이 비, 구름, 바람 신을 데리고 내려왔다 하면 농경문화를 암시한다고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처럼 말이다. 옛 사람들이 기라든가 음양오행이란 말로밖에 지칭할 수 없었던 인식 패러다임을 캐내야지 말에 눈이 가려서 우왕좌왕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이 이렇다 저렇다 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한 가지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이 있고,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는 다양한 관점, 즉 철학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해답이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관점의 소실은 전 인류로 보아서도 큰 손실이다. 다행히 인도/중국/이슬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양한 패러다임이 등장할 여건이 형성되고 있다. 논의와 공유가 용이한 형태로 다듬어진 서양 철학의 갈래인 현대 과학은 서양 철학과 수승효과를 내며 크게 발전하였다. 다른 문명권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한국인이 아무리 서구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류가 퍼져나가고, IMF를 빠르게 극복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한데는 한국만의 특수성이 서구화된 외피 아래에 든든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주류에 들지 못한 동양 문화의 특장점은, 과학이 서양에서 왔기에 우리는 우리 전통만 찾아내면 서양 입장에서는 다 새로운 접근이 된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감으로 익히는 게 문화인지라 우리한테는 자연스러운 우리 문화를 서양애들이 뿌리깊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지금 하는 식으로 서구식 패러다임을 따라하려고만 하면 서구식으로 해봐서 이미 안 된 거에는 승산이 없고, 서구식으로 좀 되는 거에는 우리한테 익숙하지 않은걸 배워서 따라잡기까지 해야하니 피곤할 따름이다. 안하던 방식으로 접근해야 새로운 답이 나온다. 우리 나라가 fast follower에서 선두주자의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동양 철학을 발굴, 번역하고 과학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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