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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찬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9
레오나르도 브루니 지음, 임병철 옮김 / 책세상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르네상스’하면 탁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다. 교과서의 내용이나 선생님의 설명보다 그저 멋지게 생기신 총각 선생님의 얼굴에 집중했던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빨간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중세 암흑기를 지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업적을 새로이 인식하고 사멸되었던 고전문화를 재생시키려는 문예부흥기”가 바로 그것이다. 단 두줄뿐이 이 교과서적 정의는 하지만 몇세기에 걸쳐 문화, 사회, 정치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르네상스 시대를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설명만을 하고 있다. 이렇게 단순화된 설명은 겉으로 부각되는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되고 - 이를테면 일반적인 인식처럼 이교도적이고 고전을 숭배한다 등의 - 그 외의 다른 측면들은 무시되어 왜곡된 이해를 하게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저작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서 르네상스를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이라고 표현한다. 교과서의 정의에 비해 상당히 추상적이지만 오히려 간결하게 그 정신을 잘 표현한, 훨씬 공감이 가는 말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내 머릿속의 ‘르네상스 = 이교도적, 고전을 찬양하고 숭배’라는 등식은 브루니의 <피렌체 찬가>를 읽으면서 상당부분 고쳐지고 덧쓰여졌다. 브루니는 책의 곳곳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피렌체가 가지는 자연적인 조건들과 그로 인한 다양한 혜택들 속에서 감사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이를테면, 책의 시작부분에서는 신에게 피렌체를 찬미할 능력을 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피렌체를 향한 신의 보호하심을 구하는 등의. 물론 중세에 비해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가 더 세속적이라고 생각되기는 한다. 도시국가들이 발전함에 따라 경제적인 부와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교회 역시 그러한 세속화에서 정결하게 스스로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중세 기독교를 부정하고 반한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기독교의 바탕위에서 인간의 가치를 다시금 인식했던 시대였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브루니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 하였고 또한 이를 가능케하는 공화주의 이념을 옹호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에 가치를 둔다. 각 개인 자체로서 보다는 공공의 선을 위해 활동하는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자유 개념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이것 만으로도 당시에는 인간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존엄하게 여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르네상스에 대한 또 다른 고정된 인식은 고대의 부흥기라는 것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이 재발견되는 등의 양적변화가 분명하게 르네상스 시기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기는 단순히 복원이나 모방의 차원이 아니라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적 가치를 부활시키면서 동시에 르네상스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 브루니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고전과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한다. 단순한 찬양과 숭배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표현방식을 변화시키고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고전에 의존했다는 편이 더 나은 이해가 될 것이다.

 브루니는 책의 전반에 걸쳐 피렌체가 로마 공화정으로부터 기원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자유의 신념을 가지고 있고, 대내외적으로뿐만 아니라 주변나라와의 관계에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또한 책의 첫부분에서부터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피렌체의 도시구성과 그 지정학적 탁월함, 그리고 금융업을 통해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번영. 이 모든 것들이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피렌체에서 시작되게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양사 강독시간에 요즘 함창 읽고있는 페트라르카의 등정기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수사학적인 표현이 지금까지 내가 접해본 글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설득적이다. 또한 다른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과, 상황에 적절하게 고전을 인용함으로써 의도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브루니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그것이 옳다, 그르다의 판단없이 오로지 고전에서만 찾고 있으며 르네상스 시대 문체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느낌을 준다.

 한창 나라가 혼란스러운 때여서인지 브루니의 시민적 휴머니즘 - 인간은 공적 영역이나 공동체의 일에 직접 참여할 때에만 비로소 참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이다 - 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만화작가 강풀의 ‘변들의 역습’을 보고나서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 사회에 대한 무관심함이 갖는 섬뜻함에 씁쓸해 했던 적이 있다. ‘정치적 존재로서만의 인간’은 아니겠지만, ‘정치적 존재이기도 하여야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한편으로는 이 글이 전쟁이 막 끝나고 혼한스러운 상황 가운데에 있는 피렌체 시민들의 생각을 모으고 단결시키려는 목적하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으레히 그런 국가적인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지리나 역사들의 공통요소들을 강조하고 국민성을 고양시킴으로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떠한 목적에서 이러한 글이 나왔든지 ‘찬가’라는 말이 주는 조금은 자부심 섞인 애국적인 느낌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상황속에서 부러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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