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흑역사 - 왜 금융은 우리의 경제와 삶을 망치는 악당이 되었나
니컬러스 섁슨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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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3조 달러가 넘는 통화를 찍어내는 미국.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자본이 몰려 있는 미국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미국의 상위 0.01%의 부자들은 하위 50%가 지닌 모든 재산보다도 많은 자산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신화를 뜬 세계적인 창업주처럼 막대한 양의 주식을 보유한 자본가도 있지만, 가만히 앉아서 돈으로 돈을 버는 자본가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흐름의 자본을 통해 눈에 보이지도, 실재하지도 않는 자본을 만드는 자들. 이른바 '금융가'들이다.

오늘날 엑슨모빌 등 초거대 정유사의 전신이 된 '스탠더드 오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석유왕 록펠러의 휘황찬란한 유산이다. 이제 사람들은 록펠러를 검은 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였던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하지만, 록펠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경쟁 업체를 제거하기 위해 갱단 100여 명을 동원하여 송유관을 폭파시키거나 방금 가설된 송유관을 통째로 들어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록펠러는 그야말로 '악당'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록펠러보다도 무서운 사람이 바로 금융왕 'J.P 모건'이었다고.

자본주의 경제가 '금융'의 시대로 접어든 순간부터 비상하고 영악한 두뇌로 자본을 굴릴 수 있는 자들은 금융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대영제국 시대가 끝난 직후의 런던이나 뉴욕의 월스트리트 같은 곳 말이다. 오죽하면 경제에 밝은 청년들이 일찍부터 금융회사를 선택해서 오늘날 영국 총리에 자격이 없는 자들이 오른다고 화를 낼 지경이다. 돈이 굴러가는 원리에 밝지 않은 대다수의 시민들 머리 꼭대기에서 자본을 만질 수 있는 자들은 막대한 돈을 벌었다. 동시에 지독한 냄새가 날 정도로 부패해갔다. 덕분에 금융이 발달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진다고 말할 정도이다.

<부의 흑역사>의 원제는 'The financial curse'이다. '금융의 저주'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원제는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간결하고 두려운 문장이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더 많은 부패를 감당하는 자들. 월스트리트는 자본을 세탁하기 위해 파나마라는 하나의 국가를 세운 셈이나 다름없고, 투명성이 떨어지는 몇몇 국가의 수장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세금과 국채 등으로 들어오는 돈을 자신의 계좌에 집어넣고 있다. 다시 한번, 보통의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금융' 파이프라인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왕립국제연구소와 조세정의 네트워크에 몸담고 있는 저자는 '조세 회피'와 '재정' 분야의 전문가이다. 그런 그의 눈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돈의 검은 흐름이 폭발할 듯 걱정을 자아낸다.

자회사를 4,000개가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있다. 물론 그중에 '실재'하는 회사는 100여 개도 되지 않는다. 엄연히 존재하는 회사를 100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그중 대다수는 파산 직전이거나 곧 매각을 앞두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회사들은 회계상으로, 장부상으로 유령처럼 존재한다. 놀라운 것은 시민들이 기차 티켓 수수료 등으로 지불한 아주 작은 돈이 덩치만 거대한 이 수상한 회사의 자회사로 흘러들어가 이리저리 소속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샌가 수천 배로 불어 '유령'의 이익으로 산정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례는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수백 가닥의 지배 구조를 통해 추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탓이다.

아이티, 베네수엘라, 필리핀 등의 국가에서 대통령을 하면 막대한 자산을 모을 수 있다. 영국의 은행들이 알게 모르게 그들의 계좌를 든든히 배불려 주기 때문이다. 1985년 마거릿 대처는 실제로 멕시코 대통령에게 시티 오브 런던이 그를 반겨줄 것이라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금융'이라는 이름을 단 괴물의 심연에서 서슴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돈을 세탁하거나, 성매매를 알선하여 국부 펀드 고객들의 환심을 사거나, '사기'에 가까운 행위를 조장하는 등의 속성만이 금융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금융 경제를 만드는 비용이 금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크며, 비용의 대부분이 무지한 일반인들에게 부과된다고 말한다. 1990년부터 2023년까지 금융 경제가 성장하며 미국이 치를 비용을 환산하면 최대 23조 달러에 달한다. 금융 시스템이 미국 경제에 가져다주는 편익을 빼더라도 가구당 1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자본주의는 완연히 '금융 경제'로 넘어오게 되었다. 모회사와 자회사, 자회사의 자회사 3개의 회사만 있으면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을 옮겨가며 몇십 배로 불릴 수 있다. 파나마 등 조세 회피를 위해 조성된 '천국'에서는 몇천 배로도 불어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마법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금융'의 힘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금융'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고, 서로 간의 신뢰로 단지 숫자일 뿐인 가치 체계를 받아들인 것이 인간이 이토록 발전한 가장 큰 속성이라 했다. 실재하지 않는 돈으로 실재하지 않는 더 큰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 금융 시스템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금융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금융과 관련된 정의를 찾기 위해 수십 연간 일해온 저자는 '금융' 뒤에 가려진 흑역사, 저주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금융의 진짜 민낯은 무엇일까. 현대의 부를 가능케한 역사 속에서 금융의 미래를 꿰뚫어 봐야 할 시간이다.

현대 금융 시스템의 저주, <부의 흑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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