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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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 하나가 보증수표가 된다는 건, 글쓴이와 독자 사이에 오랜 시간과 신뢰가 겹겹이 쌓여 마침내 또렷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익숙한 이름에 당연하다는 듯 집어든 천선란 작가의 〈랑과 나의 사막〉의 마지막 장을 덮고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한참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 감정은 무엇인가요?
왜 그렇지요?

이미 누구보다 다채로운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 인간을 향해 끊임없는 물음표를 던지던 〈천개의 파랑〉속 콜리처럼, 이미 고고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모두 알고 있는 로봇이다.

푸른 초목과 맑은 지구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을 만큼 긴 시간이 흐른 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인간 랑과 로봇 고고는 서로를 둘도 없이 의지하며 살아간다.
마침내 고고를 홀로 남겨둔 채 메마른 모래 속에 묻히는 랑. 소중한 이의 죽음과 부재, 그리고 그리움을 단지 오류라 믿으며 정처없이 사막을 떠도는 고고.

알 수 없는 ‘오류’로 재생되는 랑과의 기억들과, 그럴 때마다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삐걱이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고고를 보며 몇 번이나 명치가 꽉 막힌 듯 먹먹한 감정과 속울음을 삼켰다. 감정이란 오롯이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시선은 또한 얼마나 오만한지. 사실 우리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상황 속에서 모든 감정들을 학습해왔을 뿐, 인간을 본딴 고철덩어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기계의 외피를 두르고 몰아치는 인간의 감정을 꾸역꾸역 안으로 안으로 밀어넣으며 잡히지 않는 희망 한 줄기를 따르는 로봇 고고와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따라가는 문체. 억지로 인간의 감정을 세뇌시키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 관조적 시선이 농도 짙게 빚어 부러 눈물을 뽑아내려는 신파보다 몇 배는 슬펐다.

고고의 여정을 따라가며 만나는 풍경들은 그 곁만큼이나 외롭고 황량하지만, 결국 그 풍경 속에 서 있는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 모두 사랑이라는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천선란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늘 그 무엇보다도 차갑고 딱딱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가장 인간을 많이 닮아 있다.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져가는 인간성과 사랑을, 가장 현재와 동떨어져 있고 가장 비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작가.
사랑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쓰이더라도 결코 진부해질 수 없음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또 증명했다.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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