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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서사시 -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근대 문학 속의 세계체제 읽기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1년 12월
평점 :
모레티는 다윈주의적 패러다임을 문학사 연구의 모델로 활용하고 있다. 서문에서 그는 라마르크의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며, 진화의 요구에 따르는 변이가 아닌 무작위적인 변이random variation개념에 주목한다. 역사가 무작위적인 변이와 필연적인 선택의 뒤엉킴이라면 문학사의 경우는 수사적 혁신과 사회적 선택의 뒤엉킴이라는 것이다.
문학사에 등장한 수사적 혁신들, 『근대의 서사시』에서 다루고 있는 변종들, 즉 서사시가 멸종된 후에 등장한 서사시들, 그의 표현에 따라 다시 말하자면 백과사전적 세계텍스트들은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따라 나타난 진화의 결과물인 동시에, “극히 무책임하고 자유로운-극히 무계획적인-수사학적 실험의 산물”(44)인 셈이다. 저자는 이 수사학적 실험들이 아무런 의식적 기획이 없는 상태에서 말 그대로 “무작위적”으로 탄생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예견불가능한 이데올로기”(96)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우연히 나타난 불협화음이 다른 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브리콜라주와 재기능화가 일치를 이루는 순간, 그 우연한 순간에 문학사적 진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진화는 “우발적인 실험들, 수사학적 족쇄들, 예견할 수 없는 전환들의 뒤범벅에 의존”(97)하고 있으므로, 의식적인 담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레티가 말하는) 모더니즘적이다.
그러므로 이 우연하게 등장한 수사적 혁신은 실패의 가능성을 언제나 수반한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문학 비평이 견지해온 “동질성에의 숭배”(190)를 비판하며, 『파우스트』나 『율리시즈』와도 같은 위대한 정전들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점을 과감히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함들을 감추기보다는 “근대적 서사시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바라보자”(24)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그가 제시한 다윈주의의 패러다임에 완전히 조응한다. “다윈주의야말로 형태적 불완전성을 진화적 경로의 증거로 보기 때문”(24)이다. “기술적으로 혁명적인 작품들은 내적으로 불연속적으로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결코 일관되고 멋지게 융합된 명작이 될 수는 없다.”(191) 즉, 근대적 서사시들에 내포된 분열과 불균형, 자족적이지 못하다는 결함 등은 역사적/시대사적 흐름에 따라 진화하고 있는 문학사의 변화 과정을 증명해내는 증거인 셈이다.
문학의 형식(장르)를 종種으로 은유하여 사유하는 모레티의 시도는 흥미롭다. 다윈주의적 패러다임은 모레티의 이론에서 분명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어디까지 적용이 가능한가? 문학사의 진화에 있어서 무작위적인 변이-실험적 수사학은 얼만큼 우연적인가?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기획인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또한 문학사의 변화과정에 다윈주의를 적용할 수 있다면, 적자생존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경쟁과 자연선택은? 문학 장르들 사이의 적자생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화는 진보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