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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선택한 길 - 십자가의 죽음부터 부활의 기쁨까지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류호영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2월
평점 :
“그날과 오늘날”
-「예수가 선택한 길」을 읽고-
1.
2004년 한 영화가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바로 배우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다. 제목처럼 영화는 예수의 수난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냥 집중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로마 병정에게 폭행을 당하는 예수의 피와 살점이 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다 못 박혀 죽는 처절한 장면이 여과 없이 표현되었다. 아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이 장면을 다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관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극장 복도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 심지어 정신을 잃는 사람까지 나왔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 영화를 봐야 한다며 중고등 학생들까지 단체관람을 했었다. 영화는 놀랍게도 15세 이상 관람 가였다. 끔찍한 폭력의 묘사가 넘치는 영화가 어떻게 이런 관람 등급을 받았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대박을 쳤다.
왜 이 영화는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을까? 감독은 예수의 수난뿐만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영화의 대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언어인 아람어이고, 사복음서를 통해서 그 시대를 충실히 고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해석이 없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해석이 없이 그저 사실적으로 묘사만 했다.
사람들은 해석이 없는 사실에 열광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당한 예수가 이런 끔찍한 폭행, 고문,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저 ‘봄’으로서 안심을 한다. 극장 스크린을 뚫고 나온 해석 없는 사실을 생각 없이 그저 수용함으로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안심하며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 때마다 교회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영화의 장면을 이전과 다르게 그저 덤덤히 보게 된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여전하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해석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저 받아들이려 애를 쓴다. 그래서 믿기는 하지만, 지겹다. 답답하다. 매년 찾아오는 사순절, 고난 주일, 부활절이 그리 감격스럽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다. 그저 케케묵은 오래된 사실일 뿐이다. 그 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다. 이것을 삭제한 채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놀라운 진리를 그저 신문 기사를 읽듯이 해버린다면 우리에게 어떤 상관도 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 놀라운 진리를 해석해야 한다. 구약에서 약속하고, 신약에서 이루어졌던 놀라운 진리를 공동체는 그저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리의 말씀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이 말씀을 공동체는 한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날에 벌어진 그 사건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고민하고, 기도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것들이 실종되어 버린 지 오래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나와 너의 삶에 침투하지 못한 겉도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날’과 우리의 ‘오늘날’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이 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갔던 길이 오늘날 끊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그 길에 우리도 서게 한다. 마트에 있는 물건을 관망하는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한 길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기독교의 훌륭한 유산인 교회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길에 서게 한다. 교회력에 대한 개념도 생소한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심지어 터부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종려주일부터 고난 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 주일, 부활 주간, 부활 절기등 교회력을 상세히 적용하여 그 안에 숨겨졌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 책을 통해서 교회력이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보물임을 알게 된다. 그저 뭉뚱그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려주일부터 시작된 고난과 십자가로 가는 여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잘 묘사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잇는 역사 인식이 이런 역할을 한다. 오늘이라는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그 날을 살아갔던 예수가 여전히 한 역사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감을 알게 한다.
둘째로, 저자는 고난과 부활의 상관관계를 상세하게 밝혀 보여 준다. 존 스토트의 기념비적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 역시 같은 주장을 한다. 오늘을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직면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위축되며,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역시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빨리 부활의 기쁨만 바라게 된다.
그러나 내 죄에 대한 직면이 없이는 진정한 대속도 없다. 죄에 대한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누구나 다 알지만, 잊어버리고 외면했던 이 놀라운 진리를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십자가의 예수가 거울이 되어 외면했던 나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빛은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 새사람의 부활로 가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셋째로, 놀라운 성화들을 통해서 그 날, 그 현장으로 우리를 부른다. 개신교는 종교 개혁을 통해서 누구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바로 거룩한 상징들의 실종이다. 교회 내에 심지어 십자가까지 치워버리는 교단들도 있다. 이런 상징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거룩한 상징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상징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뽑아서 삽입한 성화들이 바로 이런 거룩한 상징의 역할을 한다. 단순히 한 장의 그림이 아닌 ‘해석’이 담겨진 상징들이다. 그 해석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한다. 단지, 책에 삽입된 성화들이 컬러로 인쇄되었다면 더 풍성한 의미를 전달했을 텐데 아쉽다.
마지막으로, 부활 주간의 부활이다. 부활절 당일 성가대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칸타타를 발표하고, 아이들은 계란을 장식한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리고 끝이다. 꼭 하나의 이벤트처럼 보인다면 내가 너무 꼬인 탓일까? 저자는 ‘기쁨의 50일’이라고 불리는 부활 절기를 부활시켜 우리에게 소개한다.
부활은 이벤트가 아니다. 그 날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놀라운 신비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온전히 경험하는 그 신비를 교회 공동체는 선험하며 부활을 살아가야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듯이 부활은 모든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옛 사람을 못 박고, 새롭게 참 사람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이자, 축복이다. 이것을 기뻐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저자는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소하게 여길 기쁨의 50일을 소개하고 그 뜻을 밝혀 줌으로 부활을 살아내는 부활의 능력이 숨 쉬는 공동체를 꿈꾸게 한다.
4.
한국 교회는 세월호의 비극을 짊어진 채로 부활절을 맞이해야하는 숙명을 떠안게 되었다. 삶과 괴리되고, 역사와 멀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날’이 우리의 ‘오늘 날’이 되고, 우리의 ‘오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날’이 되어야 한다.
시작된 사순절, 여전히 전 세계가 구원을 바라는 이 시점에 이 책을 통해서 성경을 다시 보고,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너를,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래 본다. 구원은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며, 완성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살아내는 교회 공동체가 이것을 증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