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김기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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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9The Buggles“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유일무이한 히트 곡을 이 세상에 내놨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곡이었다. 영상 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Mtv 개국방송에 이 곡이 쓰였다. 이제 소리로 듣는 시대는 지나고, 보는 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했다.

 

21세기 영상 문화의 아이콘은 단연 유튜브다 요즘 초딩들은 텔레비전을 안보고 유튜브를 본다. 초딩 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민 모두가 하루 종일 스마트 폰을 통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시청한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에 길들여져 버렸다. 스마트폰의 발전과 보급은 이런 감각적인 문화에 기름을 부었다. 이로 인해 보는 문화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고, 유튜브는 바로 그 정점에 있다.

 

이런 영상문화의 발전은 종교에 직격탄을 날렸다. 고등 종교는 모두 경전을 가지고 있다. ‘경전은 신자들이 읽어야 그 가치를 발한다. 그러나 영상에 익숙해진 사람들, ‘감각적인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텍스트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소년, 청년세대들이 그러하다. 짧은 단문의 카톡으로 피상적인 말들을 보내고 받는데 익숙한 이들에게 엄청난 두께에다, 재미까지 없는 종교의 경전은 기피대상이다.

 

특히 성경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만큼 성경읽기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수십 종의 큐티잡지가 출간되고, 매년 통독을 강조한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강단에서 외친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읽지도 않는데 깊이 읽기인 묵상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2.

김기현 목사의 신작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은 고전적인 방법의 새로운 변주를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시중에 나온 수많은 묵상에 관한 책들은 거의 다 내용이 거기가 거기다. 묵상에 관한 거의 정형적인 규칙인 기도-읽기-묵상-적용-기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은 아니지만, 묵상을 전혀 다른 깊이로 인도한다.

 

이 책의 요지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기 하가이다. 저자는 묵상의 원뜻을 파고들었다. 일반적으로 묵상은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묵상은 반복해서 읽기라고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해서 지나갔던 묵상의 원어 하가의 의미를 발굴해 내었다. 무엇인가를 억지로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읽음으로 그 뜻을 스며들게 한다.

 

개신교가 잃어버렸던 전통 중 하나인 렉시오 디비나성독이라는 고전적인 전통을 소개함과 동시에 동양적 공부법을 접목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이를 통해 혼자 생각하는 것의 한계를 벗어난 듣기의 영역으로 이끈다. 말씀은 결국 절대자의 음성을 경청하는 행위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억지로 묵상하고 뻔 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의 외부에서 다가오는 말씀의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둘째는 말씀 안에 머물기이다. 저자는 과감하게 적용을 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사람들은 아마 화들짝 놀랄 것이다. 묵상의 꽃은 적용이라고 다들 배웠는데, 적용을 위해서 묵상을 하는데 하지 말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적용이야말로 묵상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 전통 묵상 방법인 렉시오 디비나에는 적용이 없다. 적용은 근대 문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야 하는 문화와 시각적인 영상 문화의 결합 속에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내야 하는 조급함이 성경 묵상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저자는 그저 반복해서 말씀을 읽음으로 그 안에 머물기를 요청한다. 여러 가지 참신한 방법으로 하루 종일 말씀 속에 머물러 있기를 제안함으로 말씀의 깊은 곳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뻔하고 반복되는 피상적인 적용 속에 묵상하는 사람 스스로 지치게 되어 묵상을 포기하는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적용은 스스로를 변화로 이끌지도 못한다. 진짜 적용은 말씀안에 머물며, 말씀에 푹 잠길 때 시나브로 일어나는 삶의 변화이다.

 

3.

비디오는 라디오스타를 죽였다고 노래했지만, 결론적으로 틀렸다. 비디오가 흥왕했지만, 라디오 역시 여전히 살아 있다. 기존의 라디오뿐만 아니라 팟캐스트, 라디오의 유튜브 방송등 다양한 방법으로 듣기는 진화하고 있고, 보기와 듣기의 콜라보가 일어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튜브는 성경을 죽일 수 없다.

 

분명 유튜브로 대변되는 감각적이고 보기로 대변되는 문화속에 종교는 쇠퇴되고 있고, 특히 기독교는 더욱 가파른 내리막길 속에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대한 말씀 묵상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기독교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것만 찾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가벼움에 대한 저항으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깊이를 찾고 있다. 영적인 무엇인가를 목말라 한다. 본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욕망에 대한 대답이다. 해변에만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깊은 바다로 항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럼에도 이 책의 자그마한 단점이 있다. 첫째로, 동어반복이다. 위의 두 가지 주제가 책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중요한 주제이기에 반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조금 줄였으면 더 좋을 뻔했다. 둘째로, 워크북의 필요성이다. 이 책의 방법대로 묵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워크북이 필요하다. 막상 따라하려면 막막한 부분도 있기에 워크북이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가벼움의 세상 속에 깊이를 추구하는 신자들이라면 이 책을 찾고 읽게 될 것이다. 말씀에 목말랐던 신자들에게 이 책은 반가운 단비와 같다. 구하고 찾는 자에게 톨레 레게, 톨레 레게라는 음성을 이 책이 대신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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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선택한 길 - 십자가의 죽음부터 부활의 기쁨까지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류호영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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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과 오늘날

-예수가 선택한 길을 읽고

 

 

1.

2004년 한 영화가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바로 배우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다. 제목처럼 영화는 예수의 수난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냥 집중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로마 병정에게 폭행을 당하는 예수의 피와 살점이 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다 못 박혀 죽는 처절한 장면이 여과 없이 표현되었다. 아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이 장면을 다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관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극장 복도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 심지어 정신을 잃는 사람까지 나왔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 영화를 봐야 한다며 중고등 학생들까지 단체관람을 했었다. 영화는 놀랍게도 15세 이상 관람 가였다. 끔찍한 폭력의 묘사가 넘치는 영화가 어떻게 이런 관람 등급을 받았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대박을 쳤다.

 

왜 이 영화는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을까? 감독은 예수의 수난뿐만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영화의 대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언어인 아람어이고, 사복음서를 통해서 그 시대를 충실히 고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해석이 없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해석이 없이 그저 사실적으로 묘사만 했다.

 

사람들은 해석이 없는 사실에 열광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당한 예수가 이런 끔찍한 폭행, 고문,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저 으로서 안심을 한다. 극장 스크린을 뚫고 나온 해석 없는 사실을 생각 없이 그저 수용함으로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안심하며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 때마다 교회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영화의 장면을 이전과 다르게 그저 덤덤히 보게 된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여전하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해석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저 받아들이려 애를 쓴다. 그래서 믿기는 하지만, 지겹다. 답답하다. 매년 찾아오는 사순절, 고난 주일, 부활절이 그리 감격스럽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다. 그저 케케묵은 오래된 사실일 뿐이다. 그 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다. 이것을 삭제한 채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놀라운 진리를 그저 신문 기사를 읽듯이 해버린다면 우리에게 어떤 상관도 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 놀라운 진리를 해석해야 한다. 구약에서 약속하고, 신약에서 이루어졌던 놀라운 진리를 공동체는 그저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리의 말씀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이 말씀을 공동체는 한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날에 벌어진 그 사건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고민하고, 기도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것들이 실종되어 버린 지 오래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나와 너의 삶에 침투하지 못한 겉도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날과 우리의 오늘날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이 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갔던 길이 오늘날 끊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그 길에 우리도 서게 한다. 마트에 있는 물건을 관망하는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한 길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기독교의 훌륭한 유산인 교회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길에 서게 한다. 교회력에 대한 개념도 생소한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심지어 터부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종려주일부터 고난 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 주일, 부활 주간, 부활 절기등 교회력을 상세히 적용하여 그 안에 숨겨졌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 책을 통해서 교회력이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보물임을 알게 된다. 그저 뭉뚱그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려주일부터 시작된 고난과 십자가로 가는 여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잘 묘사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잇는 역사 인식이 이런 역할을 한다. 오늘이라는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그 날을 살아갔던 예수가 여전히 한 역사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감을 알게 한다.

 

둘째로, 저자는 고난과 부활의 상관관계를 상세하게 밝혀 보여 준다. 존 스토트의 기념비적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 역시 같은 주장을 한다. 오늘을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직면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위축되며,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역시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빨리 부활의 기쁨만 바라게 된다.

 

그러나 내 죄에 대한 직면이 없이는 진정한 대속도 없다. 죄에 대한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누구나 다 알지만, 잊어버리고 외면했던 이 놀라운 진리를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십자가의 예수가 거울이 되어 외면했던 나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빛은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 새사람의 부활로 가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셋째로, 놀라운 성화들을 통해서 그 날, 그 현장으로 우리를 부른다. 개신교는 종교 개혁을 통해서 누구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바로 거룩한 상징들의 실종이다. 교회 내에 심지어 십자가까지 치워버리는 교단들도 있다. 이런 상징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거룩한 상징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상징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뽑아서 삽입한 성화들이 바로 이런 거룩한 상징의 역할을 한다. 단순히 한 장의 그림이 아닌 해석이 담겨진 상징들이다. 그 해석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한다. 단지, 책에 삽입된 성화들이 컬러로 인쇄되었다면 더 풍성한 의미를 전달했을 텐데 아쉽다.

 

마지막으로, 부활 주간의 부활이다. 부활절 당일 성가대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칸타타를 발표하고, 아이들은 계란을 장식한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리고 끝이다. 꼭 하나의 이벤트처럼 보인다면 내가 너무 꼬인 탓일까? 저자는 기쁨의 50이라고 불리는 부활 절기를 부활시켜 우리에게 소개한다.

 

부활은 이벤트가 아니다. 그 날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놀라운 신비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온전히 경험하는 그 신비를 교회 공동체는 선험하며 부활을 살아가야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듯이 부활은 모든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옛 사람을 못 박고, 새롭게 참 사람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이자, 축복이다. 이것을 기뻐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저자는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소하게 여길 기쁨의 50일을 소개하고 그 뜻을 밝혀 줌으로 부활을 살아내는 부활의 능력이 숨 쉬는 공동체를 꿈꾸게 한다.

 

4.

한국 교회는 세월호의 비극을 짊어진 채로 부활절을 맞이해야하는 숙명을 떠안게 되었다. 삶과 괴리되고, 역사와 멀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날이 우리의 오늘 날이 되고, 우리의 오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날이 되어야 한다.

 

시작된 사순절, 여전히 전 세계가 구원을 바라는 이 시점에 이 책을 통해서 성경을 다시 보고,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너를,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래 본다. 구원은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며, 완성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살아내는 교회 공동체가 이것을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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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문장은 단순한 생각의 도구가 아니다. 우리의 정신 안에 세계와 그의 질서를 구성하게 하는 생각의 도구다. 정신이 문장을 만드는 것이아니라 문장이 정신을 만든다! 이것이 문장이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생각의도구들과 다른 점이자, 중요한 발견이다.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bathma가여러 개의 팔로 우주와 그것의 질서를 창조한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문장이 우리의 정신 안에서 바로 그런 일을 하는 브라흐마이고, 문장의 팔 하나하나가 곧 세계를 짓는 브라흐마의 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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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문장은 단순한 생각의 도구가 아니다. 우리의 정신 안에 세계와 그의 질서를 구성하게 하는 생각의 도구다. 정신이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정신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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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곱 DNA - 축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이중적 욕망
김기현 지음 / 죠이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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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식상한데.. 성경에서 제일 많이 언급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야곱이 아니던가? 그가 형에게 팥죽으로 사기 친 것,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것 등등 우리는 주일학교 공과공부부터 수많은 설교를 통해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 야곱이다. 이런 야곱으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일단 기대가 반쯤 꺾인 채 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독자들의 예상을 배반한다. 너무나 자주 듣고, 많이 안다고 생각한 야곱을 우리는 실상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성경에 나오지만, 사실 사기꾼 같은 녀석이요, 별로 본받을 것이 없는 인물이 야곱이다. 그래서 우리를 주눅 들게 하지 않는 몇 안되는 성경속 사람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변증한다. 바로 이런 야곱의 DNA가 우리에게도 역시 흐르고 있다고!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배배 꼬여 있듯이 야곱도 영적 갈망과 육적 욕망이라는 이중성으로 꼬여있다. 저자는 바로 이런 이중성이라는 화두로 야곱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야곱의 삶은 축북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축북의 정의가 하나님과 야곱이 서로 다름으로 많은 험악한사건들이 그에게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야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저자가 보여주는 야곱은 거울을 들고 있다. 웬 거울이냐고? 그 거울은 우리를 비춘다. 묵직한 소리 없는 외침으로 말한다. 네가 손가락질하는 야곱이 바로 너라고! 당황스럽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래 맞다. 야곱이 바로 우리다. 나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경우도 많고, 이도 저도 아닌 때도 부지기수지만, 이것과 저것 둘 다인 때도 많다.” (P. 229) 야곱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우리는 이것아니면 저것을 원한다. 이분법적으로 선인 아니면 악인으로 나누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인물에게서 무엇을 발견한단 말인가?

 

그러나 실제 우리 삶에 이런 명확한 것은 거의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더 많지 않는가? 아침에 은혜 받고, 저녁에 절망하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지만, 돈은 더 바라는 우리. 제자리에서 계속 경계선만 오가는 야곱이 우리임을 이 책은 고백하게 한다. 지렁이 같은 야곱의 삶과 하나님의 은혜의 이중 나선은 꼬이고 꼬여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하나로 귀결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우리 삶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이야기가 실종된 시대에 저자는 성경의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전해 준다. 식상하고 닳고 닳은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성경에 있음을 증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야곱들이 이 책을 읽고 야곱이 누린 진정한 축복을 받기를 손 모은다.

 

끝으로 시바타 도요의 시 약해지지 마의 한 구절로 소개하고자 한다. 꼭 야곱이 고백한 것 같은 이 시다. 이 시가 주는 위로를 이도 저도 아닌 이 세상이 모든 야곱들에게 바친다.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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