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 상 Mr. Know 세계문학 48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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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래가 일본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다, 그나마 근래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외에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작가들이란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나쓰메 소세키 정도가 다일 정도다. 때문에 소설을 읽기 전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고, 구매도 거의  

충동적으로 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구입한 수많은 책들 중에 이 책을 골라 잡은 것은 가독성 좋고 재미 

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예상했던 것만큼 이 책은 가독성이 좋았지만, 본래 일본어판  '세설'은  

가독성이 그리 좋은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은 문장이 끊이지 않고 쉼표로 계 

속해서 이어져 있는 데다 시점이 뒤죽박죽이라 번역 후에 내용을 알 수 없는 고약한(?) 상태가 되고 마는 까닭에 국내에 

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사실상 번역이 불가능한 책으로 치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번역가의 노고가 있어 나는 편히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번역에 후한 점수 를 주고 싶은 부분은 세세한 주석이었다. 1940년대의 소설을, 그것 

도  일본의, 거기다 오사카라는  지방색이 도드라지는 소설을 2000년대의 한국인이 이해의 불편 없이 읽기란 그리 쉬운 일 

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궁금할 틈도 없이 궁금증이 해결 될 정도로 주석이 잘 달려 있어 번역의 세심 

함이  돋보였다.  

  

 '세설'은 그야말로 일본, 그저 일본풍이라거나 일본적이라고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 그 자체, 특히 오사카라는 지방을  

그린 소설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작품 속에서 어찌보면 지리멸렬해 보일 정도의 일상까지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다. 때 

문에 소설을 읽는 와중에 도대체 이 이야기는 끝이 날까 하는 의문이 든 적도 있었지만, 신기한 것은 그 밑도 끝도 없는 일 

상이 어느 순간 몹시도 궁금해 진다는 점이다.  

  

 '세설'은 몰락한 마쓰오카 가문의 네 자매, 특히 셋째 딸인 유키코의 혼담이 중심이 된 소설이다. 유키코는 지금으로서도 올 

드미스에 속하는 서른 넷이 될때까지 시집을 가지 못한 처자인데,  작품의 말미에 가서까지도 여러 차례 선을 보고 각종 이 

유로 그 혼담은 성사되지 않는다. (그녀의 혼담 성사 여부는 직접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결혼 못하는 여자 이야기는 현대 

에도 흔하디 흔한 소재이므로 특별할 것이 없을 것이다. '세설'은 이렇듯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 마저도 일상이라는 테두리 

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끝까지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은 생소한  일본의 전통 문화와 세심한 여성  

심리 묘사에 있다.   

   

  앞서 밝힌 바 있듯이 이 소설은 1940년대 오사카를 살아가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것도 계절별로 꽃놀이, 반 

딧불 잡이, 송별회 등을 하면서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간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계절은 돌아오고, 자매들은 그 돌아온 계 

절에 맞는 행사를 진행한다. 그 중간 중간 선을 보고,  간혹 막내딸인 다에코가 사고를 쳐주는(?) 것이 사건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적 행사와, 행동들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그것의 생소함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불필요하게 느껴  

질 만큼의 일상적 행동조차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일상적인  행동이었을 것들이 현대 이국의 감상자 

들에게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소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전통 문화를 알게 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 

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료로써의 문학 작품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실제 모델이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소설 속 네 자매 이야기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 번째 부인과 그녀의 자매들을 모델 

로 했다고 한다.) 소설 속의 네 자매는 각기 다른 인격을 가진 개인,  특히 '여성'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느껴진다. 그것은 오 

랜 관찰에 의한 결과물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그가 남성이라는 점에 있다. 대개의 경우 이 

성의 작가가 이성의 화자나 주인공을  내세운 소설을 읽을 때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경우가 많다. 특히 심리묘사에 있 

어  그런 점은  더욱 두드러지고, 대개 피상적인 묘사에 그치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성향은 '다르다'는 것이 만고 불변의 진리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는 여성의 심리를 세 

밀하게, 마치 들여다 보듯 그려내는 작가의 힘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여성 편력( 다니자키 준이 

치로는 여성을 경외시 하다시피 사랑했다고 한다.) 이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렇듯 이 소설은 사실상, 단순 서사에 있어 즐거움을 만끽하기는 힘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사건 없 

이 잔잔한 일상이 쌓여가고,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 어느덧 숨어있던 문제가 불쑥 튀어 나오는 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렇게 불쑥 튀어나온 사건도 큰 갈등없이 해결되어 버리기 때문에 큰 위기나 절정이랄게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지극히 시대 

적인, 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7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숙성한 일상의 재미가 있어서이고, 잔잔한  

것 같은 여성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복잡다단한 심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일상이란 것도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진부함을 벗어던지고 제법 쏠쏠한 재미를 선사할지도 모를 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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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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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는 그저 쓸쓸한 외톨이가 떠올랐고,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 ‘아무도’에 나도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는 내가 요즘 우표 값이 얼마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손 편지를 써본지도, 받아본지도 오래되었다는 사실도.
  고지서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텅 빈 우체통처럼 ‘아무’란 대명사와 ‘도’라는 보조사의 조합이 끌어낸 울림이 공허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속에 포함되는 수많은 타인들의 얼굴이 슬프게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은 내게 고독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편지를 보내지도 받지도 않는, 그렇게 고독이란 병을 앓고 있는 그들이 나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다른 이들처럼 매일 문자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쓰고, 통화를 하고, 메신저를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간혹 시간이 나면 대면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 마음을 전한 것이기 보다는 용건을 전하거나, 주변에서 일어난 잡다한 사건을 늘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무거운 진심을 담아내기에는 그런 수단들이 너무 일회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점점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나도 한 때는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멀리 전학 간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친구의 답장을 목이 빠져라 기다려 보기도 했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긴 시간동안만큼이나 응축된 마음을 손 글씨로 또박또박 써내려갔고, 차곡차곡 쌓인 그 마음들이 타인에 불과했던 한 사람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연결해 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빠르고, 편해진 대신 관계를 맺는 사람도 맺을 수 있는 사람도 덩달아 많아졌다. 생각의 속도보다 말의 속도가 더 빨라졌고 가슴이라는 웅덩이에 진심이 고일 수 있는 시간이 촉박해졌다. 그렇게 나는 말을 더듬듯이 내 진심을 더듬는 사람이 되었고, 어느 순간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다. 소설 속 화자처럼 말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인 화자는 말더듬이다. 모든 절망이 그 말더듬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할정도로 그로인해 친구도 많지 않았고, 잘난 형과 여동생 사이에서는 불쌍한 아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점점 ‘척’하는 것이 많아졌다. 알고도 모른 척, 아니까 모르는 척. 그렇게 타인에게 진심을 드러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눈 먼 개 ‘와조’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타인들에게 이름을 묻는 대신 숫자를 부여한 그는, 일면식도 없던 그들에게 주소를 묻는다. 그리고는 헤어질 때쯤에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편지해도 될까요?”
  그 질문이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고독한 한 인간이 고독한 또 다른 인간의 가슴에 두드리는 노크처럼 여겨졌다.
  ‘똑똑똑’ 제가 당신에게 나의 진심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의 나열처럼 수많은 타인들은 ‘나’라는 시작점으로부터 연쇄적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비록 고독한 개인일지라도 사실은 혼자이지도, 혼자일 수도 없다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화자는 그 깨달음을 고독과 홀로 싸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갇힌 세상의 틀의 깨고 나오는 여행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점은 화자가 여행을 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작품 말미에 가서 코가 시큰해지는 반전이 찾아오지만, 나는 굳이 화자의 고독을 그런 극단적 상황에서 기인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공포는 고요 속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인간의 고독은 개인 그 자체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내 개인의 견해이고, 작가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고독한 한 개인에게 더 과중한 고독을 안겨준 대신 작품 말미에는 화자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따스한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우체국을 찾아 나섰다. 근방에 있던 두 개의 우체국이 골목 한 귀퉁이의 우편 취급소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규격봉투에 사용할 수 있는 250원의 우표를 10장 샀다. 그 10장의 우표는 지금 나의 수첩 속에서 열 번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내 가슴의 웅덩이에 고일 진심을 천천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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