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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편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안문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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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편지 

짧게 감상을 남기자면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보고싶은 책이다. 
이 책은  시인계로 입문 하려는 젊은 남자와 릴케가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남편에게 버림받고 어린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인과 주고받은 릴케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편지글은 단순히 한 남자, 한 여자에게 해주는 말이 아닌, 사람 전반을 대상으로 앞날을 고민하며,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는  젊은이에게는 릴케의 애정어린 조언을,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는 인생의 고난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위안과 위로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 처럼들린다. 때문에 오랜 세월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고 고전의한 부분으로서 전해지고있는 것 일테지.

올해 가을 어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간단히 접하게 됬다. 이를 계기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내게는 정말 귀중한 조언자가 되 주었다. 물론 이책이 어느길로 가세요! 라고 길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기로에 서 있을 때, 무언가 되겠다는 결심의 문 앞에서서 다시한번 그 타당성을 점검해보고, 신중한 선택을 할 고민을 해본다는 것은 귀한 작업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자 할때,  그토록 괴롭게 고민 해 보고 결정 했던가, 모든것이 급 변하고 그 모든 가치가 돈으로 몰리는 세상에서 멈춰서서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자아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중요시 여기며 그들로부터 자아를 찾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의 시선은 어디에 붙들려있었나.  (아 창피해.이게 아닌데 ,, 이런걸 쓰려던게 아닌데)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는, 비록 내가 릴케가 살던 때처럼 전쟁으로 흉흉한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팍팍한 삶 속에서느끼는 불안과 막막함 속에서 위안과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대화속에는 꾀나 철학적인 내용도 담겨있었던 것같다. (사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잘 추측되지는 않았지만..)

릴케를 읽으면서 감사한 것은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 이다. 나 자신에 대한 탐구, 방관자적 삶의 자세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잉태하는것, 물론 내가 시인이 되려하거나, 예술가를 꿈꾸고있지는 않지만, 가끔은 우울게도, 원망스럽게도 여겨졌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부러웠던 것은 릴케가 나누었던 젊은 여성의 서신에서 여성의 예술적인 이해도였다. 그 당시의 여인들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소양을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나보구나 싶어서 부러웠다.  지금은 우리들은 그저 입시를 위해서만 달려오고 있으니.. 씁쓸 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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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종교와 철학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존 음비티 지음, 장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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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종교와 철학.                      - 음비티

 

 

오랜만에 다시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 무슨 생각에서 책을 고른 건지. 역시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문제였나 보다.

 

현재 음비티 외에 아프리카의 종교관을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해 놓은 책은 없는 같다. 해설에서도 나오다시피 책이 그렇다고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프리카 인에 관한 시간관념이라든가, 삶에 대한 자세가 비교적 설명되어 있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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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비티 아저씨는 아프리카인의 종교,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프리카인의 시간관념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관념에는 미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래가 없다기 보다 미래는 그들에게 주는 의미가 없다고해야 맞을 것이다.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기본적인 자체가 단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일상들. 밭을 메고, 물을 긷고, 가축을 돌보는. 이런 일상의 반복이 언제나 지속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때문에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 이를테면 천재지변이라든가, 공동체 안에서 흔하지 않은 사건들의 발생 등의 이유를 과거를 통해 찾는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현대화가 진행된 아프리카의 도시에서 이러한 시간관념이 얼마나 통용이 되는지는 미지수다. 음비티 아저씨는 적어도 전통사회에서는 절대적이다라고 말했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에서만 그렇다는 소리일 것이다. 아프리카 사회가 얼마나 변모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 변화하는 사회에서 바라보자면 정체되어있는, 뒤쳐진 듯한 느낌을 지울 없다.

 

이제 아프리카 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아프리카 인들은 사람이 죽어도 사람을 기억하는 누군가에 의해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책에서는 살아있는- 죽은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고 설명이 복잡했다. 하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에서 A라는 사람이 죽었다. B 혼자 독백을 한다. A, 너는 갔지만 안에 너는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바로 이것 이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죽은 존재이지만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며, 사람에 대한 의식을 행한다. 마치 우리가 조상을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지만 음비티 아저씨는 이것이 조상숭배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유는 죽는 사람이 선조 만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어린 아이가 죽는 경우를 포함시키는 같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고 나면 이제 살아있던 사람이 완전히 죽는 것이된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진 존재는 공동체사회의 스피릿 된다. 스피릿 인간과 신의 중간적인 존재라고 설명하는데, 좀더 한국적인 쉬운 예를 들자면 스피릿 귀신, 영혼 같은 존재라고 해도 같다.  

 

모든 자연에는 신적인 존재가 깃들어있고, 신적인 존재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스피릿이라는 중간 매개체, (한국적으로는 귀신) 도움을 받아 이야기한다. 또한 신적인 존재는 의인화 되어있다.

자연물을 신격화 하거나, 영웅적인 물을 신격화하거나, 그런 자연물을 의인화 하거나 하는 작업들은 인류가 해왔던 기본적인 창작 작업(?)이다. 때문에 사실 여기까지의 내용에서는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내용을 읽고 있자면, 아프리카사회의 종교,하고 하기보다는 무속신앙에 좀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에서는 더욱 강한 형태로 드러나는 같다.

 

아무튼 음비티 아저씨는 신비한 , 마술 주술에 관한 내용도 서술하고 있는데, 사실 이쪽부분은 가볍게 넘겨야 부분인 같다. 물론 이세상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구성이, 단순히 사람들의 경험담을 옮겨 적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다루기 애매하다고 해야 할까, 다만 부분 집고 넘어갈 점은 부분에서도 나오는 주술이나, 미신과 같은 내용이 매우 친숙하다는 점이다. 손톱, 발톱은 아무렇게나 버리면 된다 거나, 사람을 저주할 인형을 만들어놓고 바늘로 찔러댄다거나 하는 내용은 이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존재라는 푸근한 생각을 갖게도 한다.   

 

정말 흥미로운 개념은 바로 악과 윤리, 정의에 대한 개념이다. 앞서 풀어놓은 관념들이 모여, 아프리카인 만의 독특한 윤리관이 생겨났다. 아프리카 사회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이다. 개인의 위법행위는 공동체에 대한 위법행위로 간주될 있다. 신은 위법행위를 사람을 처벌 하며 이렇게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는데 만약 나쁜 짓을 사람이 처벌 받지 않는다면 그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게 된다. 또한 개인의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처벌이 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권위를 가진 자가, 권위를 맘대로 휘둘러 아랫사람의 재산을 탈취한다든가 하는데 일은 위법이 아니다. 아프리카 인들은 권위자가 그런 짓을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법행위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들이 말하는 위법행위란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의 사람 (신이 수도 있다) 대한 도전 이라고 인식될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내용들이 음비티 아저씨가 이야기 같이 아프리카 전반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러두고 싶다.

 

삶을 바라보는 작은 인식의 차이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윤리관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은 놀랍고도 신기하다. 미래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이들에게 서구사회의 미래에 대한 관점이라든가,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자세는 아프리카인의 전통 종교와는 꾀나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던 같은데, 이런 사회 속으로 어떻게 기독교나 이슬람이 녹아 들어갔는지, 그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의 형태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오늘의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책을 쉽게 이해했는가 대한 내용이 주가 되었던 같다.

... .. 쓰고 나니 창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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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류큐의 정치 (천줄읽기)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568
이하 후유 지음, 윤명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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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류큐의 정치


이하후유


나는 류큐 국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자세하게 아는 바는 없다.

단지 오키나와 일대지역이 일본에서는 아이누인, 조선인과 함께 일본 내에서도 차별받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다.

나의 마이너 기질이 발동한 탓인지 잘 모르는 나라에 대한 단순 호기심에서인지 나는 고 류큐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고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류큐국은 근대 이전까지는 류큐국이라는 일본과는 다른 나라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아니 그 이전인가?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배하에 있다가 해방이 된 역사가 있는 겉 같다.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점이 벗어나 있는 탓 인지 이 책에서는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하후유는 류큐국의 정치를 분석하면서 류큐민족의 독자적인 특징을 이야기하면서도 일본과 류큐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마지막에 일본이 변방(류큐를 포함한 조선 아이누 등)민족들을 어떻게 포용해야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으며, 류큐에 대해서는 일본 안에서 부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저자 이하후유가 류큐의 정치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제정일치사회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고대국가의 변화양상을 보면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제정분리사회로 변하면서 나라의 정치 제도가 발전한다. 류큐국 역시 제정분리사회로 바뀌는 것과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로 신궁(제사)과, 황거(정치)의 분리이다.


하지만 ‘가와카미 하지메’라는 인물은 이것이 제정이 분리 된 것이 아니라 제정일치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더욱더 강력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하후유는 이 인물의 주장을 들어 류큐국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특징, 즉 제정일치의 사회에서의 정치적 구조를 설명한다.


류큐국은 사쓰마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도 제정일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왕국의 모습이었다. 또 신관이라는 종교행사를 담당하는 자가 굉장히 깊숙히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또 종교관례를 담당하는 주체가 여성이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특징이라고 술하고 있다.


또 일본과 류큐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일본의 고신도의 모습을 류큐의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내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나는 애초부터 일본의 고신도가, 류큐과 일본 두 나라의 고유한 종교형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도의 초창기 모습은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무속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동양권에서는 아니 서양에서도 세상의 만물을 신으로 삼고 제사지내는 것은 어디에서나 있어 왔다. 또한 조상신을 모시는 것 또한 한중일에서도 관찰 할 수 있다. 앞서 들었던 무속신앙의 모습 이외에 신도 고유의 다른 특징이 설명된다면, 이하후유의 주장은 내게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일본과 오키나와 지역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적인 흐름과 큰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하후유가 살아있을 당시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다이쇼시대를 거쳐 쇼와시대까지 들어선, 대내외적으로 격변의 시대라고 불릴 만 한 시대였다. 서양의 신식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서구열강의 반열에 들고자 주변 국가들을 통합하여 대 일본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것이다. 시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사상, 가치관 역시 근대식 제국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을 테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오키나와 학을 연구는 자연스럽게 내지인과 변방 민족들의 합일에 방향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키나와 인들에게 과거 중국, 인도 등 선진국에 대한 신문물을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던 일본사를 이야기하면서 류큐국 또한 발전된 제도를 흡수해야 도태되지 않는다며, 일본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한다고 촉구한다. 일본 역시 중국과 주변국과의 단절의 역사를 반성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발전 해 나가야 한다며 앞으로의 일본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타민족 수용에 대한 문제해결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인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개운한 마무리는 아니겠지만 오키나와 정치 발전 자체에 초점을 두고 읽는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서적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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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도 없는 무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피터 무누헤 카레이디 지음, 양철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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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도 없는 무덤

- 피터 카레이디

 

영국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케냐.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일어난 자주적 무장투쟁 마우마우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소설.

 

식민지배하의 암울하고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담담하고 조용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피해자나 가해자 입장이 아닌 제 3자의 눈으로 감정이입 없이 서술해나간다. 암담한 상황의 슬픔 감정이 증폭되어 표현된다거나, 잔인성의 묘사로 상황을 극대화시키는 일 없이 단순히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런 방식은 글을 읽어가는 독자가 단번에 상황 속으로 빠져들기는 힘들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일들이 역사적 사실로서 있는 그대로 다가온다.

 

또한 역사적으로 마우마우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를 살짝 회피해 갈 수 있는 장치도 되는 듯 하다. 마우마우는 케냐인들의 자주적 무장투쟁으로 그 성격이 좋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편 강압적인 태도의 부정적인 면도 있었음은 확실하다.

 

소설속의 랄로노인은 강압적으로 맹세의식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의 행실로 인해 자주 마우마우로부터 협박을 받아왔던 인물이다. 주요인물인 메자블루 역시 비슷하다. 물론 전쟁군인으로 참여 하고 돌아온 이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과, 식민지배하에서 백인과 흑인들에 대한 차별 등으로 품고 있던 분노는 그가 맹세의식에 참여하고 마우마우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친구인 키나로는 그와 함께 맹세의식장소로 가면서 이것에 대한 언급이라든가 권유는 없었다. 랄로노인의 경우와는 같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맹세의식의 자리에 불려 가는데 있어서는 메자블루 본인의 의지가 투영되어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면들이 서술하는데 있어서 간략화되고 객관적 서술의 형태를 띠면서 앞선 내용과 같이 마우마우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상쇄시키고 있는 듯하다. 이런 의도는 마우마우가 가지는 민감한 두가지 관점을 적당히 공존시키고 있다.

 

식민지배하에서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메자블루 외에 간접적으로 마우마우를 지지하면서 체제의 희생양인 또 하나의 주요인물이 있다.

뭄비는 맹세의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군에게 잡혀 감시를 받으면서 지역장 인 치푸의 사욕에 희생되는 인물이다. 재미있는것은 독립을 위한 투쟁 중 가장 격렬했던 두 전투가 ‘응가이나’ 라는 마을근처에서 이루어졌는데 ‘응가이’는 키쿠유족의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하고, 마우마우의 주축이었던 키쿠유족 창조신화에서, 키쿠유족의 시조인 키쿠유와 뭄비라는 이름이 소설의 주인공인 뭄비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실제 지명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글을 읽는 나름의 소소한 재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다른 의미를 부여해가면 읽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이 책에서는 식민지배에 저항하고 희생양이 되는 인물뿐만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인물들을 양산한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인물이 그렇다.

치푸는 영국인들의 발 밑에서 실질적으로 케냐민중을 억압하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같은 동족을 착취하고 골을 빼먹는 기득권자를 검은 백인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치푸는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뭄비를 취하려한다. 마우마우의 회계를 맡고 있던 카라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민족투쟁에는 관심 없이 마우마우의 자금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당하고 그 행위가 들킨 이후에는 밀정으로 변절한다.

 

뭄비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버려진 곳은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무덤의 표식 조차 없다. 마우마우의 역사가 지워진 것처럼. 작가는 가려진 역사를 드러내고, 그러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케냐의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를 택했다. 또한 여러 번역물로 번역되어 우리들에게 읽히고 비슷한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의 공감대를 이끄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가 충족되는 부분일 것이다. ㅎ

아....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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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이봉선 지음, 박영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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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이봉선


이 리뷰를 계속 하면서 내 무식이 드러나는 게 겁이 난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게 나 인 걸.. 어쩌겠나, 엎질러진 물..


이봉선의 봉선화. 책 제목 정말 잘 지었구나. 구소 이봉선이라. 이 책으로 처음 접한 인물이었다. 검색을 한번 해보았으나, 인물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고 관련지식은 지만지의 바로 이 ‘봉선화’ 시집 한권뿐이다. 아하! 역시 지만지.


 그녀가 누구인지 신해음사는 또 뭔지 기생출신 한시 작가라는 것 외에 큰 정보가 없이 본 이 시집은 그저 아름답다, 와! 부드러운 맛이 있구나, 한시는 어렵구나, 정도였다.


두 번째 일제 강점기 시절을 거치며 신해음사에 투고한 시의 흐름이 시대반영을 하고 있던 내용에서 점점 그러한 색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시를 접 했을 때도, 아니, 시대반영은 어떻게 드러나 있는 거지?  내 눈엔 약간 이해 안 되는 옛 성의 그리움이라든가, 기다리는 자의 슬픔, 한 이라든가, 열렬한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아름다운 풍경의 묘사라든가 하는 내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내용 앞부분에 왜 제목에 쓸데없어 보이는 주석이 달려있는가 하는 것 이었다. 신해음사 몇 회에 실린 시인지 왜 굳이 주석에 달아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 중요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책을 훑었다.  이전에 읽었던 다른 시집이 경우에는 외국 시였던 탓 인지, 작가의 작풍 별 섹션이 잘 구분되어있었고 간간히 시를 쓴 배경이나 당시의 이야깃거리를 주석에 풀어놓고 있어서, 물론 주석이 많아 출판사가 싫어했을 법했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사람 시는 같은 나라사람이라 다 이해하는 줄로 아는 건가, 시와 원문이 덜렁 나와 있고는 별 설명이 없고, 주석을 읽어봐도, 뭔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해석을 들춰보며 본문을 접하자 아, 이거구나. 아....


주석은 이봉선의 활동 시기를 알려주는 것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활, 관계 등, 시와의 연결고리를 확실히 잡아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앞서 알고 있던 바와 같이 이봉선의 활동시기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 엄청 친절한 설명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족한 관계로) 조금씩 시의 성격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봄은 돌아오는데, 세상에는 오랜 세월 영웅이 없구나..’ -歲暮 中-  원문 부분도 다시 보았다.


해, 세월이 지다. 저물다. 아, 내가 간과한 부분이 여기 있었다. 한자를 잘 읽지는 못해도 염두하며 보아야할 부분은 확실히 있는 거다.  처음엔, 중 고등학교 때 줄기차게 배워왔던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등의 내용이 워낙 강하게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강점기 시대반영 치고는 꽤 부드러운 시군,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목에서부터 암울한 시대가 왔음을, 나라를 구할 영웅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것도 10대 소녀(?)가.


나는 몇 년 전 읽었던 다른 시 하나를 기억해 냈다. 푸른 풀밭에 죽어있는 젊은 병사를 묘사한 시였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났다. 지식 없이 시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매우 화사한 날 새파란 풀밭위에 죽어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매우 이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 상상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운 장면이 인간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었다는 모순점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한 전쟁, 때문에 그 시는 더욱더 처절하고 슬픈 시였던 것이다. (슬픈 시를 아름답다고 느끼다니!) 활동작가의 배경을 아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또 다른 감동과 여운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대단함을 더욱 드러나게 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며, ‘그건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니야’ 정도로 이야기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한때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들을 글로 적어봐야겠다 싶어 시도해봤던 적이 있다. 그렇게 내 글을 보고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하고 종이를 좍좍 찢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는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고,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인식도 머리에 콰콱 박혔다. 그러고 보면 작가라는 사람들은 정말 존경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


구소에 대한 궁금증은 많았다 그녀가 여류시인이면서 기생출신인데, 기생인데도 양반가의 소실이었다니, 양반과 기생은 상반되는 존재라고 생각해왔건만, 일부러 기생으로 길렀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기생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천하디 천한 직종이 아니었던 것 일까. 당시 기생은 어떤 대접을 받았던 걸까, 단순히 구소가 뛰어난 인재여서 대우를 받았던 것일까.


또 그녀는 3명정도의 남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실은 아니지만 김홍조의 부인이었다가 사후, 정태균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은 일명 과부를 소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과부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었던 것 일까.

기생임에도 첩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단순히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을 까, 재능이었을까.

김홍조의 소실이었을 때는 그녀도 활동을 계속 해왔었으니 꽤나 여성의 입장이 좋았을법 하지만, 실제 남편 집안 내에서는 그녀가 기첩정도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었고, 정태균의 진짜 소실이 되고난 후부터 모든 활동이 끊겨버린 것은 역시 여자가 재주를 부리는 것에 대한 세간의 이목이 좋지 않아서였던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구소의 부모님들은 혁신적인(?) 마인드를 소유한 사람들이가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건가.;;


결과적으로  또 이끌림 없는 글을 두서없이 적어버렸다. 이번엔 책 내용도 거의 없고.

그래도 누군지 모를 당신이 만약 이 글을 읽어준다면,.. (창피하겠소..)

  

구소의 시는 한시라서 직접 한시를 해석하며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무리이니, 누군가가 풀어 써놓은 글을 읽으면서 감상해야한다는 약간의 제약이 있지만, 부디 그렇게라도, 구소의 청량한 감성을 들여다 봐주었으면.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그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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