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문장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지훈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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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사상을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로 담아내고,
신작보단 고전으로 돌아가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독서를 하다보면 아주 가끔씩 이상한 일을 겪곤 한다.
내용이 갑자기 머릿속이나 가슴속에 확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보통 이런 경험은 읽다가 다시 뒤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는 잘 쓰여진 책에서나 가능했다.
 
위 책은 정말 오랜만에 정신이 맑아지며 작가가 내게 다가오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던 저서이다.
쇼펜하우어의 문체는 정말 간결하고 단호하다. 그가 한 줄 한 줄마다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사상을 담은 것이 느껴진다.
 
이러한 문체는 그가 당대를 비판하였듯이 오늘날에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문체는 신념의 표현인데, 신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채 저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신간이나 베스트셀러, 혹은 학술지 등을 보면
굉장히 난해한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거나 불분명한 표현 및 오탈자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학자나 작가는 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인데, 위같은 행위는 무책임하며 책임회피적이다.
그들은 -판단된다, -사료된다, -평가된다 등의 불분명한 3인칭의 문체를 쓰면서 사상을 전개하는데
이는 자신이 도망갈 구멍을 열어두는 비겁한 행위이다.
게다가 어떤 작가는 대놓고 문법을 파괴하며, 온갖 수식어로 치장하여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책 말미에는 해당 서적에 대한 온갖 찬양만이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저서에 담긴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나 있을지 의문이다.
사상이 명확할수록 글 또한 간단명료하며 누구나 이해 가능하기 떄문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려는 이들이 판을 친다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사실 명예와 부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늘날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밝혀지듯이
학문과 지성의 전당인 학계에서까지 파렴치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
물론 그들이 필자보다는 학문적 업적을 쌓았겠으나, 부를 위한 불법행위는
한순간에 그들의 명예를 몰락시킬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에는 복면을 쓴 괴한들이 즐비하다. '익명성'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 정직하고 올곧은 저자 혹은 일반인을 향해 온갖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당연하다 여겨질 지 모르나,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 가면을 쓰는 행위는
 책임감을 결여한 파렴치한 이들에 불과하다. 필자의 입장도 이와 같다. 이는 비겁한 행위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정당하게
자신을 드러낸 인간과 인간과의 대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동은 언어폭력이다.
 
쇼펜하우어가 살던 당시의 독일의 상황은 오늘날의 국내 상황과 비슷한 듯하다.
양심과 책임, 정의, 도덕, 문법, 모국어 등 그 어떤 것도
무엇이 옳고 그른 지경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물론 쇼펜하우어는 자신만의 확고한 사상을 구축하여 이를 토대로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았으나,
필자는 그가 얘기했던 일반인과 같아 여전히 가치판단에 혼란을 겪고 있다.
 
올바른 것이 올바른 것이 되지 않는 사회.
아닌 것이 맞는 것으로 되는 사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우리는 잠시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추고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분노할줄 알아야 한다.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이 아닌 '분노'해야한다.
저서의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하며,
신간이나 자기개(계)발서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명확한 사상이 담긴 고전으로 되돌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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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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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포퍼에 따르면 그것은 시대정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사회 진보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시대정신은 일종의 패러다임이며, 한 세대(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서
다수의 국민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사상을 말하는데,
즉 이들이 이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포퍼는 사실상 반증가능성을 통해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한 상태에서의 토론을 중시한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저마다의 주관을 쏟아내고 있으나
주장만 있지 막연한 반대와 확정적인 말투만이 넘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발견이나 주장이
전적으로 옿고, 다른 쪽은 그르다는 일종의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인가.
 
행정학의 관점에서도 하나의 사회문제에 대해 그 접근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수많은 상이한 대안이 도출되듯이,
단일한 절대적으로 옳은 시각이나 지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가 지나쳐 상대주의나 불가지론 등에 휩싸이거나 시류에 그저 편승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그렇게 일보, 일보 자신을 진보케하여, 나아가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진보란 어떤 지식이나 발견 등이 상용화되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효용을 높이는 데 사용되고,
정책으로서 실제 목표한 것을 거둘 때를 지칭한다. 비단 자연과학자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들도 이를
염두해야만 한다. 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식의 발견은 사실상 불가하나, 그럼에도 이들은 사회를 바꿀 추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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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놀라운 정책들
조성주 외 지음 / 유니스토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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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본 책에 소개된 많은 정책들이 실제 세계를 놀래키고 당국에 변화를 몰고 온 것은 사실이다.
허나, 정책의 특성이 어느 정도 연속성이라는 것을 내포했음을 감안한다면,
응당 그것의 귀추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소액금융이라던지 핀란드 교육,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바칼로레아) 등이
이 책이 쓰여졌던 당시와는 다른 평을 얻기도 했다. 그것은 정책이 일정하게 적용되더라도,
정치적 요인이나 문화, 사회적 요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책의 귀추의 미비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에서 택한 일부 비교 방법은
비교행정이나 비교정치학에서의 방법론과 비슷하다. 즉 정책의 성공요인을 고찰한 것이다.
오늘날의 비교는 단순 정책내용이나 목적, 효과 등을 비교하는데만 초점을 맞추는데 반해
해당 학문이나 이 책에서는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요인 등의 미시적 수준부터 거시적 수준에까지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맹목적인 벤치마킹은 자칫 세금낭비,
즉 정책 실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여러가지 차원에서 신중한 비교가 필요한 것이다.
 
정책에 대해 나름 많은 강의를 들었는데, 진실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은 자명하다.
물론 여러가지 가치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정책이 있을지는, 아니 없겠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적합성(Desirability)과 효과성(Effectiveness)을 충족하는 것은 존재할 것이다.
 
정책은 신념의 표현물이자, 창의력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의지라는 표현에 특히 공감한다.
의지, 신념, 창의력에서 세상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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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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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22사단에서 전역이 불과 3개월 밖에 남지 않은 병장이 후임과 동료를 쏴죽이고 도주한 일이 있었다.
살인이란 당연히 금기시하는 것이므로 인명 피해에 대해서는 응당 차치하고서라도 필자의 짐작으로 미루어 보건대
분명 소외, 기수열외, 차별 등에서 기인한 사건인 듯 하다. 우리 사회도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적지만,
근대만큼 터놓고 이야기할만한 곳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말 한마디에 군생활이
송두리째 변할텐데,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으리랴.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와서 주위를 둘러보면,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발생한다.
아픔에 공감(Symphatize)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자기 일이어도 애써 모른척하는 이들이 대다수고, 다수를 위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치부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휴대폰만 바라보듯이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는 대 불신앙의 시대였고, 여전히 우리는 나침반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사회가 영향을 주는대로 거기 순응하고, 편승하는데 지극히 익숙해졌다.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Stranger)이 되기에, 차라리 두 눈, 두 귀 입을 다물어버린채,
때로는 듣지도 않는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만 하염없이 반복한다. 말하는 자의 잘못인지,
듣지 않는 이의 잘못인지. '대화'는 참여자가 청자인 동시에 발언자의 역할을 하며,
어느 정도의 연속성을 지님으로 판단컨대, 오늘날 대화는 없고 그저 하나의 역할만이 존재하는 듯 하다.
 
미시적 해답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경청일진대, 시스템의 문제는 그에 버금가는 정치로만 풀어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대의제가 비단 정치는 아니고, 그저 공론화의 장을 형성하고 활발히 참여해가는 것, 그게 정치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해답은 정치이자 미시적 관점의 의식고양과도 같다.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그 추악함에 몸서리치게 된다. 우리가 만들어졌으며,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세상, 그리고 그 거대한,
거미줄같은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짜여진 것이 자연스러운 섭리라 자위하며 사는 우리.
 
아이가 어른을 믿지 않고, 어른도 아이를 믿지 않는 세상, 그 끝은 무엇인가.
어른이 미안해... 그래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세월호 이후 세상이 변했는가. 대답은 'No.'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하나하나 정치로, 그 산물인 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어디서부터 이를 해결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시작은 무수하고 동시다발적이다. 그렇다면,
사회에 피해가 있더라도 정책의 내용이나 시행도 동시다발적이어야하며,
이것이 법의 정치, 질서의 유지에만 치우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다른이들뿐만아니라, 후에 우리 자식, 후손을 위해서라도,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어야 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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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스티븐 런치만 경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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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에도 필연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역사'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이 점지한 역사, 피의 역사,

인간의 역동적인 기록으로서의 역사,영웅으로서의 역사,

상대주의적 관점에서의 역사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사실상 모든 것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관점은 없습니다만

본 서적을 통하여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위에서 말하였듯이

인간이나 영웅이 만들지라도 역사에는 어느 정도 필연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스티븐 런치만은 본 저서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관점을 상당 부분 비판합니다. 기번이 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의 연대기를

의도적으로 상당 부분 축소하고, 비관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먼저 읽을 걸 그랬군요^^;)

 

그래서인지 런치만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까지의

정치적 상황과 본 연구의 범위지역의 실상을 자세히 고찰합니다.

왜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수밖에 없었는지,

함락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에 유럽에서는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를

수많은 사료에 기초하여 흥미롭게 풀어나갔습니다.

 

본 저자의 분석과 관점에서 당시 역사적 상황을 고찰한다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과거 십자군의 실패와 잦은 전쟁(장미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

콘스탄티노플과의 종교적 해석 차이 등의 문제가 내재되어있었고

콘스탄티노플 또한 잦은 침입과 영토 상실에 따른 재정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군사력 또한 과거와는 달리 다가오는 이교도(저자의 표현을 빌림)를 저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기에, 굳이 1453년이 아니더라도

그 언제라도 함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시기상의 문제이지 중세의 끝(콘스탄티노플 함락)은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위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얼마 전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를 다시 봤습니다만,

거기에서 삼풍백화점 붕괴를 다루는 것을 보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뇌물과 비리, 부실공사로 얼룩진 결과, 삼풍백화점 붕괴는 어느 정도 필연적인 사건이었음을.

하지만 위 저서의 상황과는 달리 아래 사건은 역사 속에서의 인재이므로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고, 반드시 막았어야 함을 잠시나마 생각해보았습니다.

때론 전혀 필연적이지 않은 사건이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필연적인 사건으로 보일 수 있는 법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이후 위와 같은 책은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전쟁에 관한 부분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읽어보시는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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