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하게 산다는 것 -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게랄드 휘터 지음, 박여명 옮김, 울리 하우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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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에 의한 평가와 기준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10대에 대학 입시, 20대에 취업 준비, 30대에 결혼.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순차적 단계란 것에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로 보인다. 이것은 게랄트 휘터의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그가 반복하는 "내면의 나침반"을 찾는 것. 즉, 다시말해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존엄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로 보인다. 

 


 

내면의 나침반


우리의 인생의 방향은 정해져 있는듯 하다. 성공적인 삶일수록 현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예민하게 캐치하여 그에 현명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택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나는 이를 '현명하다'라고 수식한다. 나와 같은 수 많은 현대인들에게 저자인 휘터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 존재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바라보라고 한다. 경쟁이 만연해지고 당연시 되어버린 사회에서, 타인을 밟고 올라갈 수 '밖에'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외면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다."

 


그는 신경생물학자로서 인간이 자아를 확립해가는 과정을 동물과 차별이 되는 인간의 뇌 기능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주체성이란 본능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긍정적인 관계를 통한 임펄스(자극)를 통해 구축된고 한다. 결국,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자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아이들은 인간의 존엄을 가능케하는 삶의 나침반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단계'인 것이다. 아이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는 가족, 그리고 유치원일텐데, 그가 보는 현재의 교육방식은 삶을 수단으로 보게하며, 타인을 쉽게 대상화 시키는 방식이다. 이런 교육 기관에서 아이들이 만들 '나침반'은 획일화되어 제 기능을 갖추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이런 교육 체제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원인과 대안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라고 한다.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의 존엄성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변화의 첫 단계라고 강조한다.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자신의 수업 방식이 비전형적인 것에 대해, 이는 학생들이 스스로 사색하는 법을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부모님들의 강요에 의해, 또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기위해 정해진대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키팅의 수업은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고등학생인 학생들이 체화해버린 성실하고 착한 학생의 삶의 방식은 현실적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관철시키는 아버지에게 끝까지 저항하여 벗어나는 것이 아닌 죽음을 택하는 것, 키팅 선생이 교실을 떠날 때 모든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지 않은 점만 보더라도 휘터가 주장하는 어린 아이들의 자아 구축 과정의 중요성을 떠올릴 수 있다. 아이들의 교육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 어른인 우리가 잊혀져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다시 일깨우자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다움, 존엄성, 삶의 나침반을 찾기를. 키팅선생과 같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어른'이 되길.



 

어찌보면 뻔한 이야기였다. 이기적인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 경종을 울리는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지만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명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혹은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한가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이 계속,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100명이 있는데 그 중 오직 10명만이 '다른'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이 10명이 곧 20명, 50명, 80명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현재 나의 간헐적 존엄적 삶을 더욱 긍정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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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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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소녀.


 기억 속의 과거를 통해 맞춰 나가는 무형태의 자아상 

- 표류하는 바다 위의 돛단배  


 로즈의 시선을 통한 세상의 서사는 마치 기억의 잔상들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꿈의 전개 방식과 같아 보인다. 정신없이 독자를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며,  장에서 반복되고 있는 모티브를 중첩시키고 이내 거대한 도돌이표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매력적인 점은 그렇게 복잡해보이는 방식이,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반복적인 섬세한 잔상을 일으키며 결과적으로는 정교하고 통일된 모티브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작품 속 그녀의 유년기는 "장엄한" 매질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책을 좋아하는 억압적인 아버지, 자신조차도 불안정한 생을 보내온 어린 새엄마 플로 그리고 어린 로즈와 동생 브라이언. 이들의 이야기는 평면적인 인물들일 것이라 단정했던 내 예상'을 비켜나간다. 로즈의 시점과 로즈의 인식을 통해 보는 '어른'들은 로즈의 자아를 반복적으로 억압하고 본인들의 방식으로 정립하려 한다. 그리고 이는 로즈의 첫 회상. 무의식적인 기억의 흐름이 그려내는 형태없는 자아상의 밑 그림과 같다. 


 테리 이글턴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내적 존재는 기표의 겨냥을 벗어난다"고 표현했다. 가면을 바꿔가며 타자가 자신의 내면, 즉 그의 기의를 보지 못하게 하며, 타자의 시선을 통한 '자아'인 그의 기표에 대한 겨냥을 피함으로서 그의 궁극적인 목표인 복수를 계획한다. 로즈라는 인물은 햄릿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마주하는 타자들의 시선에 순응하는 듯 하나 결국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그녀의 처절한 회피의 반복이다. 멋대로 '로즈'를 재구성하고 자신이 원하는 '로즈'로 만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남자들은 표류하는 배를 정박하려고 한다. 마치 그 배를 이끄는 것은 로즈가 아닌 자신들인 것 처럼.  


 그리고 그녀가 보는 '타인'들 역시 로즈의 시선에서 자꾸만 어긋난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통해 그들을 보는 우리의 인식 또한 그렇다. 우리가 쓰는 말이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외에도 상대가 ‘누구인가 결정하며, ‘행동 결정짓는 힘을 가지고 있다. 먼로의 거지소녀  인물들은 명명화 되는 자신 복수의 타자에 의에 결정되는 자신의 ‘정체성 반복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런 점에서 거지소녀는 로즈의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패트릭의 로즈가 '거지소녀'이듯, 패트릭 역시 로즈의 '거지소녀'이고, 플로를 비롯하여 로즈와 관계를 쌓는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다. 

 

 문학에 재능이 있는 듯한 '학구파'의 그녀가, 은연중에 예술가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드러내고, 예술가와 불륜을 맺으며, 돌고 돌아 그녀 자신이 '배우'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밀턴 호머를 흉내내듯, 타자를 연기하고 고정된 기표를 내면에 정박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그녀, 그대로 바로 '자신'인 것이 아닐까?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한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그리고 연극을 통해 타인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던 햄릿의 모습이 또 한 번 겹쳐 보인 부분이다. 그녀는 타인이 정의한 자신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함으로서 깨뜨린다. 후에는 스스로 작위적임을 인지하면서도 이내 그런 '흉내'의 옷이 자신의 몸자체가 되어 버리는 듯 하다. 

 

 아서 밀러는 비극 속 영웅은 자신의 현실 속 고투하는 모든 평범한 개인이 모두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극 속 영웅이란 자신의 Dignity, 즉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순응하기 보다 저항하여 실패하는 자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범하지만 영웅적인 것이며, 고로 실패자이다. 저항하기보다 순응하여 살아가는 자는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 결점 하나 없는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저항하여 바닥에 떨어지고, 먼지에 뒤집혀도 자신의 dignity를 위해 고투하는 인물은 영웅적인 '실패자'다. 사회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불완전한' 밀턴 호머라는 인물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그런 그를 흉내내고 그처럼 되기를 갈망하는 듯한 로즈와 랠프는 영웅적인 실패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순응과 저항을 반복하는 모습에서, 나는 '나'의 모습도 찾는다. 로즈가 그러하듯, 대부분의 우리 역시 '영웅적인' 실패자이다. 현실에 어찌 늘 저항만 하며 살아가겠는가. 순응하기도 하지만, 남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고집과 뜻이 있다. 나 역시 편견에 부딪히고, 무심한 타인이 그린 '나'의 모습을 보고 상처받는다. 로즈처럼 완강히, 조용히, 하지만 처절하게 저항하지 못하기에 그런 나 자신에게도 실망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런 비겁한 평범성 역시 나의 부분이고, 분명 이런 과정에서 고투하는 나의 모든 과정 자체가 내 삶을 그려가는 것이므로, 나는 로즈의 삶에서 되려 위로와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다. 

 

 거지 소녀 속 모든 인물들에게는 모두 선악이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악인과 선인을 구분 할 수 없다. 그런 양면적인 불완전함이 그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로즈 역시, 실수를 하고, 타인의 인생에 좋든 나쁘든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닫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갔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라는 것도 있다. 로즈의 선택적 기억이 보여주는 삶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라고 보고 싶다.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에서 담담하지만 거침없이 살아온 그녀의 모든 '실패'가 결국은 실패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담대한 '투쟁'이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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