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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밥집 - 따뜻한 한 끼, 새로운 삶의 디딤돌
김현일 지음 / 죠이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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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도서 바하밥집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에 보면 사방100리 안에 굶은 사람이 없게 하라는 항목이 있다고 한다. 실제 흉년이 심하게 들면 800석이 가득 차는 곡식 창고가 빌 정도로 구휼에 힘을 썼다고 전해진다. 최소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만 있어도 밥은 준다. 폄훼 하는건 아니지만 밥 주는게 특별한 건 아니다. 최부자도 밥을 주고, 보아스도 곡식 낱알을 흘리며 연애와 구휼의 일타쌍피를 날리지 않았던가. 과연 우리가 다시 한번 밥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밥 주는 남자 김현일 대표는 바하밥집(죠이북스 출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는 그저 밥만 주는게 다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럴까? 그렇다.

 

이 책은 인터뷰 형식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 중간 사역하는 사진이 곁들여져 있어서 대화 하듯이 편하게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긍휼 사역 현장에서 실제로 맞닥뜨렸던 문제와 대안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교회를 기웃거리는 찾는이나 새가족도 어렵지 않게 읽을만 하고 동시에 이웃을 돕고 싶어 하는 사역자들에게도 어울리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네 가지 오해를 교정했다.

 

첫째로, 김현일은 노숙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고 오해 했었다.

아니었다. 그는 멀쩡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 하다가 실패를 겪고 노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 노숙자가 되었었다. 그는 노숙인의 70~80%가 삶의 위기를 겪고 안전 장치가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현일도 70%에 속하는 이 시대의 참 노숙인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노숙을 개개인의 케릭터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함을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노숙 문제를 올바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본질적인 대안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김현일은 노숙인 사역을 원래 잘해서 잘 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도 노숙인 사역을 힘들게 시작했고 힘들게 풀어 갔다. 노숙인 출신 이라길래 쉽게쉽게 한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첫 컵라면이 내동댕이 쳐지는 경험을 비롯해 수많은 어려움 끝에 오늘의 바하밥집에 이르렀다. 때려 치고 싶을 때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는 담담한 고백이 이 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무용담보다 실패담이 더 와 닿는다.

그래서일까? 사역을 접고자 하는 위기의 순간 한 노숙인의 피부에 달라 붙어 버린 양말을 떼어 주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의 간증이 기독교 싸구려 신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간증은 다큐다. 진실하고 담백하며 허세가 없다. 눈이 돌아서 헛것을 보지 않고는 이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게다. 멀쩡한 사람을 붙들고 사역해도 지치는데 정서적 육체적으로 힘든 사람을 껴안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고 그러기에 예수를 봐야 버틸 수 있었을 게다.

 

셋째로, 김현일은 밥 짓는 일만 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를 짓고 있었다. 인문학 교실, 미술 교실을 열어서 자활의 터를 닦아 줄 뿐만 아니라 공동체 화폐까지 발행해 맘몬의 지배에 저항하고 함께 살기를 실천하는 장면에서 나는 오르가즘을 느꼈다. 이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다. 현학적인 신학 개념들의 성찬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소박한 김치와 김 반찬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밥상이다. “신학? 난 그런거 잘 모르고 내가 받은 은혜대로 산다!” 쿨내가 진동한다.

 

넷째, 김현일은 혼자 일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팀으로 일한다. 그런데 태초에 김현일이 있기전 공동체가 먼저 있었다. 그는 바하밥집 공동체를 만들기 전에 공동체를 먼저 맛본 사람이었다. 이 사역은 개인의 끈기나 케릭터로 승부를 볼 수 없다. 김현일처럼 교회 공동체 속에서 진실한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할 수 있다. 그의 형님(김형국 목사)이 주었던 우정과 형수님(신소영 사모)이 베풀었던 사랑을 먹고 자란 것이다. 이 책의 도처에 널부러져 있는 나들목 공동체 이야기는 노숙인 사역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가늠케 한다.

 

 

밥 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스스로 밥이 될 줄 알고, 같이 밥 짓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달랐다.

김현일은 그래 이렇게 살자!”라는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지만 나는 이 책의 속편을 벌써 기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하밥집은 계속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미완이며 미완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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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 리처드 마우가 개인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리처드 마우 지음, 강성호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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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대학생활은 카이퍼로 온통 물들여져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지금 돌이켜 본다'라는 수식어를 집어 넣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때는 몰랐었기 때문이다. 20살 초반의 겉멋이 잔뜩 든 대학생이 뭘 알았겠는가. 물론 카이퍼를 읽었었다. 세미나도 했었다. 평신도 신학자 육성, 코람데오, 기독교 문화 창달, 정말 많이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몰랐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랐었다.

지금은? 지금도 잘은 모른다. 아니 세세한 내용들을 대라면 그때보다 더 모른다. 많이 잊고 살았다.  20여년이 지난 후 리처드 마우에 의해 편집된 카이퍼를 다시 읽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 이런 느낌 오랜만이다. 솔직히 향수 탓도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마우는 카이퍼의 입을 빌려 '복음을 어떻게 이 시대에 적용시킬 것인가'하는 질문에 답을 주려 한다. 엉망이 되버린 사회. 시한부 환자 같은 교회. 한계를 절감하는 내 작은 인생.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복음으로 싸울 것인가? 마우는 카이퍼 속에 길이 있다고 본다. 
 
동시에 이 책은 카이퍼 신학 전반을 매우 간략하게 소개하면서도 그의 신학 사상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했다. 이 책은 카이퍼 신학의 보고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보물 지도이다. 해리포터가 투명망토를 쓰고 호그와트를 밤마다 탐험하듯이 이 책을 뒤집어 쓰면 독자들은 잠들 틈이 없을 것이다. 요더, 매노나이트, 바빙크, 네오 칼비니즘 등의 신학 용어들에 겁을 먹지만 않는다면 끝까지 여행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마우는 카이퍼의 복합적인 신학과 삶을  '영역'이라는 개념을 통해 성공적으로 풀어 내었다. 카이퍼는 교회의 다양함을 우주적인 완전한 교회를 표현하는 하나의 양식이라고 보았다. 영역주권 개념 역시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정도 유형이 분명한 문화적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가정, 국가, 사업, 예술, 교회 등을 위시한 모든 '영역'에서 각각에게 주어진 고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국가는 각 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하며 갈등의 조정자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또한 이 일은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 영역의 전문가인 평신도들이 할 수 있는 일다. 그러므로 카이퍼에게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교인의 관계, 평신도 사역이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이슈였다. 그는 '칼을 든 국가'를 옹호 했던 칼빈도 아니다. 그렇다고 탈국가를 지향했던 매노나이트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좋게 말하면 중도적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모호하다. 카이퍼는 각 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국가의 조정 역할도 인정했다. 영역들의 자율성과 국가의 개입은 매우 미묘하고도 경계가 모호하다.  하지만 카이퍼의 이러한 철학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교회가 갈수록 국가에 흡수 당하고 이용당하는 듯이 보이는 현 세대에 서로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많은 고민 거리를 던져 준다.

또한 국가가 다양한 영역들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보았던 것 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다른 사회의 제 영역들에 권위를 남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카이퍼 자신도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그의 목사직이 정치 영역에 권위를 행사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의 목사들은 겸손함을 회복해야 한다. 목사는 전문가다. 목회와 설교의 전문가다. 하지만 한국교회 목사들은 모든 영역에 권위를 가지고 싶어 안달난 것 같다.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목사라는 이른바 영적 권위가 그들의 실제 생활에 투사될때 교인들은 그것에 신탁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 사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느 학교를 갈 것인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다양한 문제를 갖고 목사를 찾고 뜻을 구한다. 신탁을 받기 위해 머리를 조아린다. 목사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권위를 남용한다. 이 위험한 굿판을 집어 치워야 한다. 평신도는 모든 영역에서 사역할 수 있는 사역자다. 이 자리를 회복시켜 주지 않는한 교인들의 유아적 영성은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20여전 열중했던 잊혀졌던 카이퍼를 다시 만났다. 여러가지 문제에 신음하는 우리 사회와 교회에 그의 통찰이 주는 유익함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카이퍼를 만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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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제자도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존 C. 누겐트.앤디 알렉시스-베이커.브랜슨 L. 팔러 엮음, 홍병 / 죠이선교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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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요더가 직접 저술한 책은 아니다. 세 명의 편집자들이 그의 설교와 강연을 엮어서 "급진적 제자도"라는 제목하에 묶어서 출간한 책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읽기 전에 편집자의 서문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총 22개의 아티클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기준하에 이 아티클들을 분류했는지? 아티클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문을 참고해야 한다.  

엮은이들은 1,700년간 기독교 왕국으로 통합된 기독교 역사가 재탄생의 진통을 앓고 있다고 본다. 편집자들에 따르면 요더는 기독교 재탄생의 임계점에 서 있는 사상가다.  이 재탄생이란  제국의 종교로서의 기독 권력을  탈피하여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기독교를 구현하는 것인데 이를 사상적으로 가장 잘 설명하는 이가 바로 요더다. 이 책은 "불순응"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기획된 요더 시리즈의 제1권으로서 제자도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십자가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자칫 사장될뻔 했던 요더의 설교와 강연은 기독교 재탄생의 산파로 다시 살아왔다. 엮은이들의 수고로움은 이 자체로 이미 보상을 받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불순응이란 무엇인가? 요더에 따르면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순응이다. 이 세상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것이 곧 이 세상에 대한 불순응이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radical)변화야 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며 교회와 세상을 향한 도전이다. 이 변화는 교회가 국가와 결탁해 제국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더는 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화를 교회 타락의 시발점으로 본다.

교회의 제국화란 이 세상을 적과 아군으로 갈라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므로 우리와 같이 하지 않는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그 정점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심지어 종교개혁 마저도 이러한 중세적 사상을 완전히 씻어 버리는데 실패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재생산 되고 있다(요더는 이 글을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 썼다). 진정한 기독교는 이러한 십자군식 사고 방식에 불순응한다. 어떠한 대의명분도 완벽하게 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떠한 적이라도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국회에 진출하고 대통령이 되면 이 사회가 거룩해 질 수 있을까? 교회가 보다 강한 힘과 재화를 소유하면 영향력을 더 끼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더 큰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이러한 콘스탄틴적인 답안지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교인과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이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성경적인 의미는 십자가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 요더는 현대 기독교를 뒤덥고 있는 온정주의, 개인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한 개인의 마음의 평안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대가를 말한다.. 그는 반정부적, 반문화적인 혁명의 전위였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무력하게 원수를 포용만 했기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근본적인 의미이며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도 이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베풂이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단순히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베풀지 않는 것은 도적질 하는 것이요, 이자나 투기로 인한 소득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요더의 제안은 매우 급진적이다. 그리스도인의 베풂은 자본주의에 대한 불순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불편해진다. 어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실천과 베풂이 모여 세상을 변화 시킨다. 

요더의 이러한 제안은 자본주의, 국가주의에 순응하면서 살기로 선택한 독자들에게 불편할 수 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을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 마음의 평안을 획득하는 정도로 결론지었던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세상과 교회에 한칸씩 자리를 틀고 몸에 딱맞는 삶의 양식을 입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 아니 한국 교회에 절망해본 사람들은 어차피 이대로 살아도 불편하긴 매한가지다. 앉아서 죽을 것인가? 변화하다 죽을 것인가?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radical'을 '급진적'이라고 번역한 부분은 못내 아쉽다. 엮은이들의 서문에 따르면 요더의 아티클을 '급진적'이라는 제목 하에 묶은 이유는 이 책이 소수의 혁명적 사상가나 사역자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모든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가르침의 뿌리(radical)를 고민하도록 자극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radical의 어원인 '뿌리'에 초점을 맞추고 '기독교의 근본 진리'로 번역하는 것이 엮은이들의 의도에 더 부합하는 번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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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 세계기독교 관점에서 보는 복음주의 역사
이재근 지음 / 복있는사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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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자꾸 교파를 말씀하시는데 복음이 중요하지 인간의 그룹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교파 따지지 말고 복음에만 전념합시다" 페이스 북의 모그룹에 실제로 달린 댓글이다. 이 분은 평신도로서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페이스북 그룹에 실리는 글들이 교파적이라고 이해하신듯 하다. 자신이 속한 교단과 신학의 색깔이 과연 무의미 할까? 순수한 복음에만 전념하면 될텐데 왜 교단이니 신학이니 공중에 붕 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한번 이라도 이렇게 쏘아 붙인 적이 있다면 이 책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하게 깨닫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네비게이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것은 아니다. 본서는 제목 그대로 "세계 복음주의"의 형성에 보다 집중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알기 위해 기독교 문명의 뿌리가 되었던 서양의 교회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 하다. 만일 지금 당장 총신, 통합이 뭔지를 알기 원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복음주의의 형성 과정을 알기 원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훌륭한 교안이 될 것이다. 

특히 본서는 복음주의가 처한 중간자적인 입장을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잘 짚어내고 있다.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가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에 저항하며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고 본다. 이 과정을 회심주의, 성경주의 십자가중심주의, 행동주의라는 복음주의의 네 요소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복음주의 발달의 여러 측면들을 신학 안에서만 한정 시켜 설명하지 않는다. 좁게는 기독교 교회 역사, 넓게는 영미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반의 변화가 어떻게 복음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유럽의 세속화, 미국 기독교계의 근본주의화, 기독교 인구의 남반구 집중화 등을 광범위하면서도 균형있게 설명함으로써 보다 복음주의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또한 20세들어 기독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오순절 복음주의 운동에 한 챕터를 할애한다. 도대체 어떻게 영미 이외의 이른바 제3세계에서 이렇게 폭발적인 교회 성장의 기운이 터져나왔던 것일까? 저자는 이를 복음의 원초적 특징에서 찾는 듯 하다. 바로 구전의 힘이다. 원시 교회는 구전되었다. 성경도 간증도 전도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사회 하층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순복음은 제3세계 저개발국가를 파고들며 원시 교회의 생명력을 다시 한번 재현한 샘이다. 순복음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이 갖는 본질적인 가치는 복음의 운동성이다. 저자는 이를 복음주의의 확장이라는 틀로서 재조명하며 순복음의 역동성이 복음주의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에필로그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세계복음주의와 한국 기독교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파고 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아쉬움은 한국 복음주의 지형도라는 형식으로 추후에 달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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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바로 읽기 SU 신학총서 1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김대웅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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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은 크게  가지 점에서 당혹스럽다.

첫째, 잠언은 세상을 너무 쉽게 본다. 잠언이 그려내는 세계는 헐리우드 영화다. 나쁜 놈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던가?  세상은 뒤죽박죽이다.

둘째, 잠언은 성경 같지가 않다. 자기계발서 같다. 부지런해라. 말을 잘해라. 친구를  사겨라. 심지어 잠언을 주제별로 분해해서  권의 처세술 재편집하고는 기독교적이란 수식어로 포장한 책이 있을 정도다.

 

바르톨로뮤는 잠언 바로 읽기 통해 이러한 당혹 스러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잠언에 대한 이러한 오해들은 피상적인 잠언 읽기의 결과임을 지적하며 보다 진지한 잠언 독서를 권면한다.  

 

저자의 처방전은 잠언을 전체적으로  권의 책으로 읽는 것이다. 그는 잠언의 문맥성에 주목한다. 잠언을 전체적으로 읽고 문학적 문맥 속에서 발현되는 잠언의 독특함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저자는 특별히 잠언의 인클루지오 구조를 강조한다. 잠언 1:7; 31:30 잠언 전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라는 지혜의 기본원리를 밝히는 주제 선언이라고 본다. 잠언의 본론 역시  문맥 속에서 독해할  분명한 지향점을 가질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이러한 구조적 독해를 통해서만이 일상의 지혜들은 비로소  자리를 찾는다. 잠언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일상의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자 출발점으로 본다. 여호와를 향한 열심은 일상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  구조를 놓친다면 잠언은 지극히 일상적인 책으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의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는 기계적 인과를 되풀이하는 책으로 전락하고 만다. 

 

잠언의 지혜가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 모델은 잠언31장의 현숙한 여인이다.  여인의 일상은 지극히 세속적이다. 심지어는 그녀의 일상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는 언급 조차도 없다. 하지만 바로 이점이 잠언의 역설이라는 것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잠언은 우리 신앙의 진가를 바로 현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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