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 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정희진 해제 / 디플롯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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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강간 피해는 수치스러운 일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수치를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이라 정의하고 있다. 성폭력/강간 피해는 두렵고, 끔찍하고, 징그럽고,더럽고, 불쾌하고, 욕지기가 튀어나오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 경험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일이나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는 일은 아님이 자명하다.


그런데 성폭력/강간 피해자는 때로 수치심을 느낀다. 누가 이들에게 수치를 느끼게 하는가?


프라밀라 패튼(Pramila Patten)은 "강간은 사회가 가해자를 처벌하기보다 피해자를 낙인 찍을 가능성이 더 많은 유일한 범죄"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많은 문화권에서 강간의 책임을 피해자의 옷차림, 말투 등에서 찾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또는 삽입 여부, 저항 여부, 강간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로맨틱/가족 관계 등을 근거로 강간의 불성립을 주장하며 강간 피해를 주장하는 피해자의 증언을 무고로 치부하는 경우도 흔하게 일어난다. 도덕적 흠결이나 '피해당한 사람'답지 않은 처신을 근거로 피해자의 증언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2차 가해도 꾸준히 발생한다. 더 최악의 경우, 어떤 이들은 강간 피해자를 성'폭행'의 피해자로 대하기 보다는 '성'적 대상으로서 피해자의 외모를 품평하고 조롱하는 방식을 통해 강간이 일어났을 리 없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래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수치의 대상이 되는 것이 누구일지는 불보듯이 뻔하다. 성폭력 피해자는 끊임 없이 수치를 느끼길 여성혐오적 문화,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와 외모지상주의 등 공고한 사회 구조에 의해 강요 받는다.


2022년 7월,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성범죄 양형기준의 특별가중인자(가중처벌 기준)에서 사용하던 기준에서 ‘성적 수치심’을 삭제하고 이를 ‘성적 불쾌감’으로 대체했다. 이와 함께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가 마치 성범죄 피해자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어 적절하지 않음을 함께 설명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 미리 당도한 인식이 만들어낸 변화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는 이제야 이 법을 근거로 수치가 피해자들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아주 느리고 더디게 오고 있을 것이다.


'수치'는 더디오고 있을 이런 인식이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도록 마중물이 되어줄 책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지면에 걸쳐 강간 피해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성폭력의 가해자, 더 나아가 성폭력의 가해자를 양산하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시스템이 성폭력을 낳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을 수치스러워 해야한다고 수치심의 주체를 정확히 명명한다.


또, 성소수자로서 겪는 '치료' 명목의 성폭력, 감옥 내 성폭력, 부부간 강간, 여성의 남성에 대한 성폭력과 성폭력 수행을 종용하는 여성혐오적 사회, 성폭력 근절을 위한 법제화 및 교정의 한계, 성범죄 처단을 목적으로 성폭력을 인종주의로 치환하는 문제, 1세계라 불리는 서구 사회가 단일한 기준으로 성폭력과 피해자의 반응 및 치료를 전 지구적으로 단일화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씨줄로, 세계 각각의 지역과 문화, 소규모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날줄로 하여 공통적이나 교차적인 성폭력이라는 경험을 근절하기 위해 초국가적으로 촘촘한 유대의 실을 엮어 내길 힘 차게 제안한다. 유발데이비스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누구인가'를 기반으로하는 정체성 정치학에서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가'를 기반으로하는 목표지향적 정치학으로 이동할 것을 재호소 한다.


"나는 교차성 페미니스트야. 그래서 나는 ㅇㅇ해" "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야. 그래서 나는 ㅇㅇ해" 같은 정체성 기반의 정치가 페미니스트들 간에도 팽배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고마워하며 무엇을 함께 성취할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질문이고 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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