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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평점 :
24권으로 구성된 고대 로맨스 '툴리 너머의 놀라운 것들 (The Incredible Things Beyond Thule)'은 지금부터 1,8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햇빛을 가리니 비키라 말했다던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도 아닌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라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갑자기 찾아보게 된 이유는 민음사로부터 받아 본 신간, <클라우드 쿠쿠 랜드> 때문이다.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실존했던 (그러나 생경해서 가상의 인물로 느껴지는)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가 상상/몽상의 세계라는 뜻을 가진 '클라우드 쿠쿠 랜드'라는 실존하지 않는 이야기를 썼다는 설정하에 진행되는 소설이다. 800페이지 분량의 이 소설은 이야기 전개가 1차원적 선형으로만 전개되었다면 조금은 지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이 책은 맑은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린 잉크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듯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읽히는데, 이야기가 선이 아닌 면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쿠쿠 랜드> 속 '클라우드 쿠쿠 랜드'에서는 갖은 고통을 이겨 내더라도 구름 위 빛나는 도시, 새들만 갈 수 있다는 상상의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양치기 아이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아이톤의 쿠쿠 랜드 향 여정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구성 단계에 따라 씨줄로 엮어둔다. 동시에 그 씨줄 위로 15세기 콘스탄티노플, 20세기 미국과 한국, 21세기 미국, 22세기 지구를 떠난 우주선 아르고스 호에서 숨 쉬며 살아갔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색의 날줄로 섬세하게 엮어낸다.
책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시대, 각자 다른 인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만나 그들의 삶에 어떤 한 페이지를 '클라우드 쿠쿠 랜드'와 함께한다. 누군가는 거듭 반복되는 아이톤의 시련에 안타까워하고, 누군가는 오히려 쉽사리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이야기 때문에 조금 더 살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이톤의 용기를 영웅적으로 받아들이며 개가를 부를 날을 기대하면서 도망치고, 누군가는 도망치지 않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선택해 걸어 영웅이 된다. 누군가는 욕망하고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는 지금 가진 것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던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이 이야기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이 이야기를 고이 보관하기도 한다.
'클라우드 쿠쿠 랜드'를 만난 책 속 인물들을 보며 나는 이야기가 가진 힘과 이야기에 우리가 주는 힘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똑같이 말하지 않고 독자 각자에게 각자의 상황에 맞는 선물로 다가가는 힘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건,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건 쓰는 일, 읽는 일, 낭독하는 일, 번역하는 일, 빈 괄호를 채우는 일, 엮어내는 일, 보관하는 일, 필사(인쇄)하는 일 등 온통 사람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건 살리고자 하는 마음, 지키고자 하는 마음, 소중히 여기는 마음, 기억하는 마음, 결국 사랑이라는 것.
문득 찢기고 낡고 바랜 오랜 이야기가 죽지 않고 살아 700년의 시기를 거쳐 각 인물에게 적지 않은 의미가 되는 이 책 속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기적이 실은 지금 내 손에 들어와 읽히는 고전의 여행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집 책장에 차곡차곡 꽂힌 고전들이 갑작스레 하나하나의 기적으로 느껴진다. 이 오래된 이야기들이 원형과는 한참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원형에 우리가 끝내 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닿으려고 하는 마음이 주는 힘과 닿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만든 기적으로 내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적에 둘러싸여 있구나. 안온하고 충만한 마음이 된다.
이 책을 이미 책과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책이 그냥 종이 쪼가리의 묶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미문이라 잘 공유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위에서 내가 공유한 감각에 공명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800페이지가 넘다 보니 쓰인 문장도 적지 않아 <클라우드 쿠쿠 랜드>가 당신에게 어떤 문장들을 선물할지도 궁금하다. 나는 책 중간중간 기후 위기, 비인간 동물을 대하는 마음, 전쟁과 평화에 대한 문장들을 줄곧 발견하게 되었다. 당신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도 살아 있으니까.
이야기를 읽는 건 작은 낙원을 짓는 것과 같으니, 이 쪽방 안에서 황동색으로, 과실과 포도주와 함께 빛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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