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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순간들 - 사루비아 다방 티 블렌더 노트 ㅣ ðiː inspiration 작가노트
김인 지음 / 오후의소묘 / 2021년 11월
평점 :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나갔던 처음과 달리, 다시 읽을 땐 잔향이 오래갔던 장을 먼저 펼쳤다. 책엔 중간중간, "작업노트"라는 코너가 있다. 티 블렌더인 저자가 (내 눈엔 마치 마법의 물을 달여내는 것처럼) 각 차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물랭루즈>가 마음에 남았었다. 차 <물랭루즈>의 제작은 이렇게 발을 뗀다. "나는 작업실에 앉아 몽마르트 언덕을 걷기 시작했다. 자주 길을 잃었다." 몸이 어딘가에 붙박여 있더라도 떠날 수 있다. 방구석에서도 길을 잃지만, 그러면서도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저자는 많은 곳에서 영감을 얻는다. '끝내주는 영감을 찾아야지!'하고 얻는 게 아니고, 일상 곳곳에 시선과 생각이 머문다. <출근하는 기쁨> 파트도 그중 하나다. 출근 준비를 하려 양말을 신던 저자의 머릿속에 문득 네루다의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 시구가 떠오른다. 한 켤레 양말에 발을 집어넣으며 그것을 "황혼과/ 양가죽으로/ 짠/ 두 개의 상자 속으로/ 밀어 넣듯이"라고 비유하는 시. 저자의 내일 버리려던 낡은 양말은 그렇게 시를 품은 양말이 된다. 그는 "새 양말은 몰라도 시적인 양말은 버릴 수 없다"라고, 그날도 "시적인 결정"을 내린다.
책을 읽으며 찻물에 붓 터치가 그려지는 상상을 했었다. 처음엔 그저 향미 담긴 글에 푹 빠질 수 있었지만, 저자의 세계를 지나 마지막 장을 가만히 닫고 나니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저자는 이렇게 한 잔의 차를 담아냈다. 나는 어디에 뭘 담고 싶나? 그럴 땐 손을 움직여야 한다. 이 마음을 붙잡으려면 내 손을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