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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록 - 여자, 글로 말하다
풍양 조씨 지음, 김경미 옮김 / 나의시간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록"은 18세기 말 서울의 양반가의 딸인 풍양조씨가 쓴 기록을 번역한 책이다.
"자기록"을 쓴 동생과 그것을 베껴 써서 필사본을 지금에 이르게 한 언니에 의해 기록이 전하게 되었다.
자매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참 인자한 사람이었다. 어린 자매는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 그들은 차례로 결혼을 하였다. 동생은 열다섯에 김씨집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과 여섯해를 살았다. 남편은 단정하고 예의 바르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내에게도 예의를 갖추어 대하였다. 부인입장에서 살갑고 애정 넘치는 남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부의 단아한 품성은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안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과거시험장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집에 돌아온 그를 따뜻하게 보해주지 못했다. 시부모의 뜻이었다. 그 자신도 더운 음식을 싫어하였다. 몸이 허해진 상황에서 국수를 먹고 탈이 났다. 설사를 하고 몸이 쇠약해지는 남편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새댁의 입장이 기록에 담겨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설마하며 시간이 무심히 흐르고 백약이 무효한 때에 이른다.
그제서야 음악을 들려주며 삶의 생기를 실어준 들 무슨 소용일까?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고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살리는 이야기는 그저 옛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은 시도조차 차단되고 죽어가는 남편 곁에 머물지도 못한다.
열녀 이야기도 허언이다. 유일한 며느리에 귀한 딸은 쉽게 죽음을 택할 수 없다.
어머니를 잃고, 친정아버지와 언니에게 의지하여 유년기를 보내고 15세에 결혼하여 20세에 청상이 된 여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을 때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동생의 글을 베껴 적으며 흘린 눈물은 또 어땠을까? 그들은 삶을 기록하며 스스로와 서로를 위로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처럼...
여성은 언제부터 글을 썼을까? 여성의 교육이 공식적으로 부정되던 조선시대에 의외로 많은 지적인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매창, 이사주당, 혜경궁 홍씨, 유한당 홍씨, 김금원 등 많은 여성들이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그렇게 많지 않다. 그들의 글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시대의 모습을 다시 조명하게 될 것이다.
"자기록"만 해도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 서울 양반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어떤 의술로 병자를 어떻게 보살폈으며, 무속은 어떻게 삶을 지배했는지 알 수 있다. 양반가의 부부, 시부모, 친정과의 관계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합리적이면서도 정이 넘치는 당시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재미가 솔솔하다.
"자기록"을 쓴 풍양조씨는 참 박복한 여인이다. 한참 앞선 시대에 여성의 삶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시기에 개인적 불행마저 겹쳤다. 그런 그녀였기에 비통함의 밑바닥에서 건져낸 자신만의 세계인 글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달리보면 그것은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틈틈이 기록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결국 일상의 힘, 기록의 힘이 대단하다.
우리 역사에 이런 여성이 참 많았다. 우리의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