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강석희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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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희 작가의 소설 속에서는 말하는 주체로서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잉된 남성자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패배를 속절없이 인정하고(길을 건너려면), 다만 낄낄거리며(앵클 브레이킹), 누군가를 괜시리 부러워하고(알레), 중요한 상황에서는 결국 탈출해버리거나(그런 식의 여름) 아무말도 하지 못(우따)한다. 그들은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상황에 혹은 스스로가 지닌 두려움에 떠밀려 비주체화 된다.

패배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지만 작품 속에서 절망하는 주인공은 외롭지 않다. 소설은 '한 사람의 편을 들기 위한 이야기'라고 말했던 정용준 소설가(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의 말처럼 강석희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최선이었음을 정성을 다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합리화나 자기연민으로부터는 멀리 도망친 그들의 최선을 성실하고 꼼꼼하게 기술한다. 주인공의 자기 서사를 만드는 방식이 찜찜한 곳 없이 선연히 납득된 이유다.

그러면 어떨 때 인간의 이야기는 '최선이 아닌 것'이 될까.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가고 싶어 이야기를 매끈하게 직조해 낼 때. 그 서사에 방해가 되는 갈등과 분열을 의도적으로 외면할 때. 자기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증명해내려하는 욕망이 읽힐 때. 최선이 아닌 이야기가 된다. 그저 이 책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자신이 갈 길을 잃었음을 시인하고 결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주인공이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간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제목,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이 지닌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소설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그런 당대적인 분열을 가장 잘 보여준 소설은 단연코 <길을 건너려면>이다. 세속적 욕망이라고 말하기도 더이상 저어되는 부동산의 세계. 모두가 길을 건너기를 소망하면서도 자신이 건넌건지 아닌지 조차도 사태 파악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나는 얼마전 15억짜리 아파트에 사는 가까운 언니를 보러갔다가, 이 동네에서 '본인이 제일 가난'하다는 푸념을 듣고야 말았다. '벼락거지'라는 말이 보통의 언어가 되고 상황 파악 조차 어려워 지는 지금, 누군들 이 세계에서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주인공은 길을 건넌걸까? 애초에 '길'은 어디즈음 있을까.

'거기로 가면 나는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도 아니었다. 빚을 갚는 데 몰두하느라 여유롭게 사는 게 뭔지 잊게 될 것이고, 한편으로는 빚조차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잊게 될 것(61페이지).'이라는 구절은 내가 최근 3년간 느꼈던 혼란과 두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갚을 수 없는 사채를 떠올리며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다리던 나는 15년 뒤 부동산의 호황을 타고 더 이상 돈 때문에 목이 졸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집 값이 이지경으로 오른 것에 비판적인 말을 얹으려다가도 내숨이 턱 막히게 되는 이유다. 집 값 상승은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그 세계로부터 최소한 나 하나는 구원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자괴감과 고통과 괴로움을 주고있는 이 미친 흐름을 바라보며 편히 냉소할 수 없는 나는 분열한다. 독수리 요새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양쪽 볼이 얼얼하도록 내 마음은 이쪽저쪽을 수도없이 오간다. 감사하면서도 혐오스럽고, 평온하면서도 이물감을 잔뜩 느끼는 그 어딘가.

작가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그 아파트도 지금은 3억정도가 더 올랐을 테다. 주인공은 이전과 말과 행동을 바꾸어대며 자신을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해대던 영주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 고마움을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내가 고통스럽게 지니고 있는 이 분열이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 될 것만 같아서. 마치 세상의 표현처럼 '벼락거지'가 된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했음을 옹호하는 것만 같아서 그 말은 어렵다. 도저히 하기 싫은, 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벼락처럼 질문이 날아든다. 그 수혜를 네가 지금 당장 입고 있잖아. 그러면서 왜 그 선택을 위해 애쓰고 용기내고 모험을 감행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조차 하지않아? 그거야 말로 이중적인 거 아니야? 고상하게 앉아 세상 욕은 다 하면서 그 수혜는 받아 누리겠다는 태도. 너무 나이브하고 이기적이지 않아? 그 질문 앞에서 주인공은 망연하게 손바닥으로 눈자위를 누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뜨거운 게 눈인지 손바닥인지(73페이지)' 나도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기에는 외면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그로인해 수혜를 본 나는 비윤리적인 삶 속으로 순식간에 함몰된다.

결국에는 모두가 선망하던 그 아파트를 계약하러 부동산에 앉을 거였으면서, 굳이 민들레 아파트를 결기있게 보러나선 주인공에게 나는 감정이입한다. 그 어두컴컴하고 누렇게 바랜 낡은 아파트에서 설핏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걸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나는 마음이 기운다. 나를 (주인공을) 나약하고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차마 자기합리화나 변명은 하지 말아야지. 그것만이라도 온전하게 감당하는게 나의 최선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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